진주성-가을이 비에 젖다
진주성-가을이 비에 젖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10.22 16:24
  • 14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윤위식/수필가ㆍ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 회원
윤위식/수필가ㆍ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 회원-가을이 비에 젖다

시월의 끝자락에 가을비가 잦다. 태풍의 광란이 땀으로 일궈놓은 가을의 꿈을 헤집어 놓은 상처에 반갑잖은 가을비가 상처를 덧낸다. 콩대도 꺾고 들깨도 베고 벼도 거둬야 하는데 밭은 진창이고 논바닥은 물구덩이다. 잘 익었는데 감꼭지가 물커지면 또 어쩌나. 베란다 바깥의 가을 풍경이 걱정스럽다. 미처 베어내지 못한 벼가 들녘의 여기저기서 아직은 제 빛깔로 비에 젖어 샛노랗다. 지난 태풍에 쓰러진 벼는 또 어쩌나. 보는 마음이 젖어오는데 거두지 못하는 심정이야 오죽이나 애가 탈까. 어서 거두어들이고 단풍 구경이라도 나서서 마음 놓고 허리 한번 쭉 펴고 턱밑까지 차오른 단내까지도 시원하게 쏟아내며 따사로운 가을 햇살과 지난여름을 화해하고 싶을 건데 가을비는 무심하게도 추적추적 농부의 가슴속을 적신다.

설악산 단풍이 주홍으로 물들어 백두대간을 타고 영롱한 빛깔로 번지며 내려온다는 아침 방송을 듣고 귀가 솔깃했던 것이 바깥풍경을 보고서야 무안해져서 괜스레 ‘창문이 왜 이리 더러워!’하고 누군가를 은근히 끌어들여 가을비에 젖어 청승스러운 애먼 창문까지 싸잡아서 탓을 한다. 민망해진 부끄러움을 합리화해보려는 고약한 심사는 어디에서도 인정받지 못할 줄을 알면서도 헛나이만 먹어 철들지 않은 설익은 인생이 처량해지는데 희뿌연 유리창은 가을비를 맞으며 쭈룩쭈룩 흐느낀다. 청명하고 따사로운 가을이 기다려진다.

이마가 따끈따끈한 가을 햇살을 듬뿍 맛보고 싶다. 꿈이 영글어 흡족한 농부의 웃는 얼굴이 보고 싶고 파랗게 높아진 하늘이 보고 싶고 두어 점 떠가는 흰 구름이 보고 싶다. 코스모스의 기다리는 마음을 흔들던 바람이 들국화의 그리움 앞에서 경건 해 질 때 개울물 소리를 들으며 시골길을 걷고 싶다. 볼이 미어지도록 볼록해진 다람쥐의 쫑긋거리는 오두방정도 바윗돌 위에서 옛정으로 그리운데 창문 밖에는 그저 가을이 비에 젖는다.

딱 일주일만 쾌청하여도 벼는 거둘 건데, 사흘이 멀다 하고 가을비가 온다. 지금은 쌀 두 되 값이 커피 한 잔 값이지만 배를 곯고 살던 70년대 전후에는 쌀 한 되 값이면 다방 커피 열 잔 값이다. 그 시절의 삶이었기에 가을걷이는 언제나 마음이 쓰인다. 추수한 벼 포대를 동산만큼 높이 실은 경운기도 논길에서는 기진맥진하다가도 골목길을 들어올 때면 더 큰 엔진소리를 내며 신바람이 났다. 지켜보는 이들도 햅쌀밥 내음을 미리 맡고 배가 불러왔던 시절이 그리 먼 옛날이 아니었다. 창밖의 가을비가 마음을 적신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