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나라와 백성을 제 몸처럼 여긴 재상
칼럼-나라와 백성을 제 몸처럼 여긴 재상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11.04 16:13
  • 15면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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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나라와 백성을 제 몸처럼 여긴 재상

정자산(鄭子産 BC582~BC522)은 중국 춘추 시대 정나라 사람으로 공자보다 약 30년 연상이다. 약관의 나이로 정계에 들어가 40년 가까이 정(鄭)나라 국정을 주도했다. 당시 정나라는 주변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 끼여 불안에 떨던 약소국이었다. 게다가 국내 정치도 허구한 날 정쟁으로 국력을 소모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정쟁의 와중에 피살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개혁 정치와 등거리 외교로 작은 정나라를 단단하게 변모시켰다. 그가 정국을 주도하자 수구 기득권 세력들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교육 장소인 향교(鄕校)는 정쟁의 장소로 변질되었다. 그의 측근과 민심은 향교를 폐지하자는 쪽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론수렴의 장소로 재활용하는 지혜를 발휘하며 이렇게 말했다. “조만간 그곳에 모여 권력을 쥔 사람들의 장단점을 논의할 것이다. 그들이 칭찬하는 점은 계속 유지하고 비판하는 점은 고치면 될 터이니 백성을 위해 좋은 일을 하면 백성의 원성도 줄어들 것이다. 위엄과 사나움만 가지고는 원망을 막을 수 없다. 사람은 누구나 비난을 들으면 그것을 서둘러 제지하려 한다. 그러나 이는 마치 넘치는 홍수를 막으려는 것과 같다. 홍수로 인한 피해는 많은 사람들을 다치게 하여 어찌해 볼 수 없다. 향교를 남겨 두는 것은 사람들의 논의를 듣는 것 자체가 좋은 약으로 병을 낫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는 또 개인 재산의 합법성을 인정하여 농지정리를 단행하고 이를 법률로 보장했다. 그리고 법률을 청동 솥에 새긴 다음 관청 문 앞에 세워 누구든 법조문을 알 수 있게 했다. 개혁에 저항하는 기득권을 향해서 백성에게 이롭다면 자신은 무슨 일이든 할 것이라며 단호하게 개혁을 밀고 나갔다. 그리고 정치의 구체적인 방법을 다음과 같이 들었다. ‘정치에는 두 가지 방법밖에 없다. 하나는 너그러움이고 하나는 엄격함이다. 덕망이 높고 큰 사람만이 관대한 정치로 백성들을 따르게 할 수 있다. 물과 불로 비유해 보자. 불이 활활 타오르면 백성들은 겁을 먹는다. 그래서 불에 타 죽는 사람은 적다. 반면 물은 성질이 부드럽기 때문에 겁을 내지 않는다. 이 때문에 물에 빠져 죽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관대한 통치술이란 물과 같아 효과를 내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그래서 엄격한 정치가 많은 것이다’즉 효과가 금방 나타나는 불과 같은 정치에 의존하기보다는 더디지만 그 영향력이 크고 깊은 물과 같은 너그럽고 큰 정치를 추구하라는 말이다. 그가 재상이 되어 개혁 정치를 추진한 결과 1년 만에 더벅머리 아이들이 버릇없이 까부는 일이 없어졌고, 노인들이 무거운 짐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되었으며, 어린 아이들이 밭갈이 등 중노동에 동원되지 않게 되었다. 2년째가 되자 시장에서 물건 값을 깎는 일이 없어졌고, 3년째가 되자 밤에 문을 잠그지 않아도 괜찮았고 길에 떨어진 물건을 줍는 사람이 없었다. 4년이 지나자 밭 갈던 농기구를 그대로 놓아둔 채 집에 돌아와도 아무 일이 없었다. 5년이 지나서는 군대를 동원할 일이 없어졌고 상복 입는 기간을 정해서 명령하지 않아도 다들 알아서 입었다.

사마천은 정자산의 정치에 대해 ‘속일 수 없다’는 뜻인‘불능기(不能欺)’란 표현을 썼다. 정치를 하는 사람과 정치를 아는 사람은 다르다. 정치를 잘하려면 정치를 알아야만 한다. 40년 동안 오로지 백성과 나라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쳤던 그가 세상을 떠나자 백성들은 “이제 누구를 믿고 살아가야 하냐?”며 통곡했다. 공자도 눈물을 흘리면서 안타까워하며, “그는 고인의 유풍을 이어받아 백성을 사랑했다”라는 애도사(哀悼辭)를 남겼다. 그가 죽자 후손들은 장례를 치를 비용이 없어 그의 시신을 광주리에 담아 메고 산으로 가서 그냥 묻을 수밖에 없었다. 이를 안 백성들이 안타까워하며 돈이며 패물을 가져와서 제대로 장례를 치르라고 울며 애원했다. 그러나 후손들은 모두 거절했다. 백성들은 가져온 돈이며 패물을 정자산의 집 앞에 있는 시내에 던져 버렸다. 그러자 시냇물이 영롱하게 빛이 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 시내를 ‘금수하(金水河)’라고 불렀으며 지금도 옛날 정나라 도읍이었던 하남성 정주시에 흐르고 있다. 그의 할아버지는 최고 통치자인 목공(穆公)이었으니 그의 신분은 왕족인 셈이었다. 이처럼 고귀한 신분의 인물이 장례 치를 비용조차 남기지 않았으니 얼마나 청렴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탐욕과 사리사욕에 찌든 우리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어떤 것인지 아느냐고 따끔하게 일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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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한 2019-11-07 16:19:09
브라만교의 창조주에 대항해 일어난 인도 변방 네팔지역의 항거자 Monkey 부처는 발상지 인도에서도 배척받고,약소국 동남아 국교로 되거나 동아시아 여러나라에서 외래 포교종교로 하층신앙으로 배격받으며 오늘에 이름.

윤진한 2019-11-07 16:18:19
공자님의 공식 지위는 문선왕(文宣王). 그리고 선성(先聖). 요.순.우.탕.문.무.주공과 같은 성인임금 반열이심. 아버지는 은나라왕족의 후손 무인집안, 어머니도 무인집안 출신. 나이차가 많이나서 결혼. 그 당시 동아시아 최고 문명국이자 강대국인 주나라의 왕족.귀족.무인들의 일부다처제 제도에서 태어나신것으로 여겨짐. 공자님은 춘추전국시대 여러나라 왕들과 지식인들을 감복시켜 많은 제자를 배출하시고, 공자님의 유가는 제자백가중에서 한나라 국교가 되어, 선사(先師)로 숭배받으시다 나중에 문선왕으로 추증되심. 한나라시대 국교인 유교는 동아시아 지역에서 세계종교가 되어 오늘에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