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하동 옥종 조정래 조복애 조옥래
진주성-하동 옥종 조정래 조복애 조옥래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11.06 14:41
  • 14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하동 옥종 조정래 조복애 조옥래

경남 하동군 옥종면 월횡리 출신 3남매는 민족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 놓고 투쟁했다. 조정래(1914~1935)선생은 1931년 2월 진주고보 3학년 재학 중 동맹휴교를 주도하다 퇴학처분을 받았다.

일본 동경으로 유학을 떠나 동경전기학교에 입학했다.

일본 반제동맹에 가입하여 동경지방위원회 전기학교반에 배속되었다.

일본 적색구원회에 가입하여 동경지방위원회 죠오세이지구 산하 가두반에 배속되어 활동했다.

1932년 초에는조공주의자협의회에 활동하고 서울에서 반제동맹 결성에 참가하고 12월에는 범태평양 민족대표대회에 파견되었으나 오사카에서 1933년 1월 19일 일본 경찰에 피체되어 1934년 12월 최종판결에서 징역 4년형이 언도되었으나 거의 죽게 되자 집행정지로 1935년 5월 20일 석방되었다. 그러나 곧 고문 후유증으로 순국했다.

동경에서 논의했던 구호는 ‘타도 일본 제국주의’, ‘조선어 본위의 교육시행’, ‘식민지 노예교육 반대’, ‘토지제도 개선’, ‘조선 절대독립’등이었다.

조정래 선생은 필자가 노력하여 2008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으며 그 당시 부산에 사는 6촌 조범래가 정부에서 주는 시계와 훈장증을 받아갔다. 미혼으로 후손이 없기 때문에 안타까운 일이다.

여동생 조복애 여사는 오빠가 순국하자 유관순과 같은 마음으로 일제 타도를 외치며 항일활동을 전개하고 1941년 숙명여자전문대학 재학중 일제의 침략을 타도하다 1942년 일경에 피체되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서대문 감옥에서 약 7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서대문감옥에 입소할 때 찍은 사진이 남아 있다.

아우 조옥래 선생은 1941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조선청년회를 조직해 활동했다. 1941년 일본 석천현 금택고등학교 재학중 김화기, 박응포 등과 함께 조선청년연구회를 은밀히 조직하여 동급생·후배들에게 독서회를 통해 민족의식 고양 및 조선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목적으로 항일투쟁이 계속되자 일경에 피체되어 1943년 4월 일본 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형이 언도되어 곧 석방되었다.

전남 출신 김화기 등은 정부포상이 추서되었으나 조복애, 조옥래 선생은 지금까지 미포상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