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가을의 끝자락에서
진주성-가을의 끝자락에서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11.12 14:01
  • 14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윤위식/수필가ㆍ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 회원
윤위식/수필가ㆍ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 회원-가을의 끝자락에서

가을의 들녘은 씨 뿌려 가꾼 자인 농부들의 몫이고 가을의 강은 먼 길 찾아온 기러기의 몫이며 가을의 산은 바지런을 떠는 다람쥐의 몫이지만 가을의 길은 길 떠나는 나그네인 여행자의 몫이다. 고산준봉의 영롱한 단풍의 빛깔이 찬 서리에 젖어 자드락으로 흘러내리더니 이제는 된서리 하얗게 내린 들녘은 더없이 황량하고 기러기들도 가을의 강 물안개 속에서 한낮을 기다리고 볼이 미어지도록 바지런을 떨 다람쥐는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췄다.

소리 없이 깊어 버린 가을, 찬 이슬에 젖은 옷깃을 가을 햇살에 헹구며 인생길을 걷는 나그네도 외롭다. 할머니의 머리카락만큼이나 은빛으로 반짝거리던 억새꽃도 생기를 잃어 푸석거리며 바람결에 흩날린다. 발끝이 시려오는 들국화는 그래도 한낮의 햇살을 받아 온화한 자태에서 화사함을 품어내며 그리움에 가슴 조이던 코스모스가, 그 청순한 미소를 잃고 초라해진 모습을 굽어보며 안쓰러운 마음에 시린 가슴을 여민다. 도란거리던 개울물 소리도 그쳤다. 눈부시게 샛노란 은행나무도 나신으로 홀로 설 내일을 대비하고, 붉게 물든 감잎은 가을볕의 끝자락을 붙잡고 마지막 열정을 빨갛게 태우는데 가을걷이의 마지막 나눔인 볼 붉은 까치밥이 가지 끝에 애처롭다. 들녘은 텅 비어 황량하다. 우쭐우쭐한 산꼭대기를 타고 내려온 능선 발치의 골짜기들도 거무스레하게 움츠렸는데 굽이진 산자락은 불타던 열정의 미련이 아직은 남아서 오색빛깔을 지우지 못하고 미적거린다.

이제는 머뭇거리던 것도 보내야 하고 떠나야 할 것은 붙잡지 말아야 할 계절의 황혼인 깊어 버린 가을이다. 끝끝내 남겨진 것이 소중한 것을 깨닫고 가지런하게 아귀를 맞추어 다독거려야 할 때다. 아랫목의 이불 속으로 스멀거리며 기어드는 추억도 쓰다듬고 잊혀져가는 어렴풋한 얼굴들도 기억 속으로 불러 들어야 할 게다. 용서받지 못할 것이 그 무엇이었으며 용서하지 못할 것이 그 무엇이었던가를 돌아봐야 하고 못다 한 것이 무엇이었나를 짚어봐야 할 때다. 아직은 황갈색 가랑잎으로 바스러지기에는 아쉬운 가을이다. 하지만 그리 많은 시간이 남은 것이 아니다. 아직은 손끝이 따뜻하다. 우리의 삶이 더 황량해지지 않으려면 이제는 잊어도 좋을 이야기는 묻어두고 말 못한 사연은 털어내며 못다 한 이야기는 나눠야 할 때다. 가슴의 온기가 식기 전에 더 가까이 다가앉으며 서로의 손을 마주 잡아야 한다. 밤이 길어서 외로워지는 겨울이 머지않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