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사는 것과 죽는 것에 대한 작은 배움
아침을 열며-사는 것과 죽는 것에 대한 작은 배움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1.14 16:41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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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소설가
강영/소설가-사는 것과 죽는 것에 대한 작은 배움

우리는 사는 것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한다. 삶이란 알면 알수록 정말이지 불가사의하고도 황홀지경이다. 그 이상이다. 봄이면 피는 온갖 꽃들이며 곧이어 무성해지는 이파리들이며 어느것 하나 신기하지 않은 것이 없다. 우리가 딛고 살고 있는 이 거대한 땅덩어리가 공중에서 빙글빙글 도는 사실은 또 어떤가. 남녀가 좋은 마음 하나 되는 순간이야 말해 무엇하랴.

반면에 죽는 일에 대해선 말하기를 꺼린다. 마땅한 현상인데 죽는 거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하지 않은가. 그렇다고 죽는 걸 죽을 때까지 모르고 살아가는 건 많이 아쉽다. 기독교에서는 죽어서는 천당엘 가거나 지옥에 간다는 설이 인구에 왔다 갔다 하고 불가에서는 극락왕생이 있고 무간지옥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미진하다. 누구나 죽어 천당이나 극락왕생하고 싶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지금 현재’의 삶과 얽혀들어야 되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니 그것으로 살지도 못한다.

죽으면 여태의 삶이 몽땅 사라져 그야말로 끝난다고 보는 걸 불가에서는 단견이라고 한다. 또 영혼 같은 것이 있어서 육체가 죽으면 그것이 빠져나가 계속 이어진다는 상견도 있다. 대개의 경우 상견에서 죽음을 이해하는 듯하다. 그래서 한을 풀지 못한 죽음은 귀신이 되어 구천을 떠돈다고도 하고. 망자를 보내며 좋은 곳으로 가라고 명복을 빌어주기도 하고.

단견과 상견 모두 편견이라고 불가에서는 말한다. 이를 뛰어넘어 사는 것과 죽는 것이 따로 있는 게 아닌 중도의 진리가 있다고 가르친다. 눈이 번쩍 띄는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따르면 어느 순간에는 죽음의 상태로 잠수를 타고 어느 때는 현실에 사는 모습으로 펄펄 난다는 것이다. 이 현상을 공기에 비유하면 공기가 새게 움직여 바람이 되면 살아가는 모습이고 잠잠해져서 공기로 돌아가면 죽음의 모습, 밤에 잠을 자면 죽음, 아침에 일어나면 삶에 비유할 수 있다. 이렇게 이해하면 삶과 죽음은 둘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다.

남녀노소 삼라만상 모두가 아침에 잠깨어 일어날 때마다 새로 태어난 아기처럼 순수하고 명징하게 새로이 살 수만 있다면 살아가는 매순간이 얼마나 경이로울 것인가. 그 하루를 살고 밤이 되어 경이로웠던 하루를 가슴벅차하며 죽음 같은 깊은 잠을 자면 그 잠이 또한 얼마나 달고 맛있고 유익할 것인가!!! 살아낸 삶이 고와야 그 죽음도 곱다는 건 불변의 진리다. 매일매일, 순간순간 이토록 삶과 죽음을 명실 공히 살아내면...그 삶이 얼마나 아름다울 것인가. 얼마나 가슴 뿌듯하고 위대할 것인가. 죽음도 아름답고 삶은 더 아름다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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