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아침을 열며-“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1.27 16:15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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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
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Matt. 5:3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虚心的人有福了,因为天国是他们的。马太福音 5:3)

예수의 이른바 ‘산상수훈’에 맨 처음 등장하는 말이다. 이른바 8복 중의 하나다. 내식으로 말하자면 ‘예수의 가치론’에 해당한다. 나는 이 말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그래서 선전을 좀 하고 싶다. 민들레 씨앗처럼 공중에 흩날려 퍼뜨리고 싶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 이 말의 핵심인 ‘심령이 가난한 자’ 혹은 ‘마음이 가난한 자’라는 것이 어떤 상태의 사람인지 (그 표현 때문에) 의미가 불명료한 것이다. 철학은 이런 불명료함을 잘 용인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해’와 ‘해석’이 필요해진다. 철학공부를 조금 하다보면 가다머의 ‘해석학’에서 이런 철학적 개념들을 접하게 된다. 소개하자면, 텍스트의 지평과 해석자의 지평이 하나로 융합되는 이른바 ‘지평융합’이 곧 이해이고 그 이해의 완성이 곧 해석이라는 것이다. ‘지평’이란, 문제를 바라보는 시야를 가리킨다. 딱딱한 철학적 단어들을 나열해 송구하다. 쉽게 풀자면, 책에 쓰인 난해한 말을 나 자신의 의식-지식-경험으로 미루어 짐작해 ‘아하 이거구나’ 하고 통하게 되면 그게 바로 ‘이해’라는 말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라는 말도 그런 이해와 해석의 대상이 된다. 그리스 원어를 알면 좀 낫겠지만, 그쪽 전문가가 아니라 찾아보진 못했다. 이것도 송구하다. 그러나 중국어 번역을 보면 조금은 이해에 도움이 된다. 위에서 굳이 중국어를 병기한 까닭이다. ‘허심한 사람’ 즉 마음을 비운, 마음이 비어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 된다. 이건 이해가 가능한 말이다. 허심이란 욕심을 내려놓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예수의 이 말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우리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사실 좀 정체불명이다. 이걸 논하자면 책 몇 권으로도 모자란다. 하나의 학문분야가 필요하다. 그러나 극도로 단순화시키면 이게 욕망의 덩어리라는 게 부각된다. 대표적인 것이 돈을 탐하는 것, 지위 내지 권력을 탐하는 것, 공적을 탐하는 것, 명성을 탐하는 것, 이른바 부귀공명에 대한 욕망이다. 그게 우리 인간의 마음이란 것이다. 온갖 희로애락이 다 이것들과 얽혀 있다. 행복과 불행이라는 것도 다 이 욕망들이 지휘하고 연주하는 교향곡이다. (심지어 그것이 주변 사람들은 물론 전 인류에게 해악을 끼치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 누구나 다 알겠지만, 이게 결코 우아하고 감미롭지만은 않다. 욕망은 쓰디쓴 뒷맛을 동반한다. 부-귀-공-명, 생각해보라, 그 뒷맛이 어떤 것이었는지. 가져본 사람들이 가장 잘 알 것이다. 어떤 영광에도 그 장막 뒤엔 검은 악마가 도사리고 있다. 고(苦)가, 고통이, 괴로움이 마치 그림자처럼 동반되는 것이다. 심지어 사랑조차도 예외가 아니다. 지극한 사랑 끝에 생활고가 있거나 자식이 속을 썩이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다. 마음이, 심령이, 즉 욕망이, 욕심이, 우리 인간을 지옥행 열차에 몰아넣는다. 우리 대부분 인간들의 여실한 삶의 모습이다.

그러면 이제 답이 보인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렇게 되는 것이다. 마음을 비운 사람, 욕심을 내려놓은 사람, 그런 허심한 사람이 복이 있다는 말이다. ‘복이 있다’는 것은 축복받은 상태가 된다(blessed)는 말이다. ‘천국이 저희 것’이라는 것도 다른 말이 아니다. 욕망에서 자유로운 상태가 되면, 즉 욕망의 지배에서 벗어나면, 고통과 괴로움이 사라지니 (혹은 덜게 되니) 그게 곧 천국이라는 말이다. 욕망은 고통의 원인이니, 원인인 욕망이 비워지면 결과인 고통도 사라진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다…’ 불교의 이른바 인연법이다. 예수도 이미 이것을 통찰하고 있었던 셈이다.

물론 ‘천국’이 어떤 곳인지 어디에 있는지 그건 하나의 신학적 과제다. 이미 고백했지만, 나는 그 정체를 잘 모른다. 그것이 구름 위에 있는지 죽음 뒤에 있는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마음을 비우고 고통이 사라진, 그리하여 평온한 상태가 되면 그게 ‘거의 천국’이라는 것은 나도 인정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것이다.

그러니 굳이 고통이 씀바귀처럼 맛있다는 생각이 아니라면 마음을 비우자. ‘허심한 사람’이 되자. 욕심을 덜자. 거기에 작은 천국, 소박한 천국이 펼쳐질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예수의 이 말은 진리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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