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만길 문학박사, 진주 4·19 혁명 상황 논문 발표
허만길 문학박사, 진주 4·19 혁명 상황 논문 발표
  • 강미영기자
  • 승인 2020.04.21 18:16
  • 1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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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절의 도시 진주 60년 만에 역사자료로 남게 돼
▲ 허만길 문학박사

“값진 진주 역사 잊혀지는 것 안타까워”

당시 진주사범학교 학생회 위원장 활동
4월 25일 시내 고교 학생회 연합 시위
600여명 집합…민주당원 시민도 동참


60년 전 진주의 4·19 혁명 진행 상황이 당시 17살 진주사범학교 학생회 위원장이었던 허만길 문학박사(현 국제PEN한국본부 이사)에 의해 회고 논문으로 상세히 기술돼 충절의 도시 진주의 역사 자료로 남게 됐다.

허만길 박사는 그 당시 본인이 겪었던 상황과 <부산일보>, <동아일보>, <조선일보> 기사를 참고해 <한국국보문학> 2020년 4월호에 4·19 혁명 60주년 기념 특별기고로 ‘진주의 4·19 혁명 상황과 허만길의 선언문 회고’를 발표했다.

4·19 혁명은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 정권의 장기적인 독재와 그해 3월 15일에 실시된 대통령과 부통령 부정 선거에 대한 학생들이 중심이 된 민주화 혁명을 가리킨다.

선거 당일 마산의 학생 시위에서 경찰의 발포로 많은 사상자가 나고 행방불명됐던 마산상업고등학교 김주열 열사의 시체가 해안에서 발견되자, 4월 11일 마산의 학생과 시민의 시위가 크게 일어나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에 이르기까지 진행됐다.

허만길 박사는 조선일보 1960년 4월 17일 기사에서 “(진주에도) 마산에 못지않은 불안과 흥분이 뒤섞여 충돌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동아일보 1960년 4월 18일 기사에서 “전국적으로 데모가 가장 위험 지대로 알려지고 있는 진주”라고 보도했을 정도로 진주의 4·19혁명 상황은 격렬했는데, 그 중요하고 값진 역사적 사실이 진주에서 잊혀지고 있는 것이 안타까워 60년이 지난 지금이라도 역사적 자료로 남기고 싶어 이 논문을 썼다고 밝혔다.

허만길 박사는 논문에서 4·19 혁명의 발단과 일반적인 진행 과정을 소개하고 진주의 4·19혁명 진행 상황을 날짜별로 상세히 기술했다. 논문의 주요 내용을 소개해 본다.

허만길 문학박사의 진주 4·19 혁명 60주년 기념 특별기고가 게재된 한국국보문학 2020년 4월호 표지.
허만길 문학박사의 진주 4·19 혁명 60주년 기념 특별기고가 게재된 한국국보문학 2020년 4월호 표지.

◆3·15 부정선거 후 4월 17일 이전까지 산발적 시위와 민주당원의 철야농성 = 허만길 박사는 3·15 부정 선거 이후 진주에서 처음에 민주당원과 고등학생, 시민들이 경찰의 눈을 피해 예고 없이 산발적으로 시위를 벌이곤 했는데, 한정된 기자들의 인력으로는 취재할 겨를조차 없었다고 했다.

진주사범학교 학생회 위원장이던 허만길 박사도 산발적인 시위에 참여하곤 했는데, 허 박사의 언행 하나하나는 학교 선생님들과 경찰의 주시를 받았으며, 부모는 허 박사의 신변을 몹시 걱정했다고 한다.

4월 13일부터의 진주의 시위 상황은 <조선일보>, <동아일보>, <부산일보>에 구체적으로 보도되기도 했다.

<조선일보>는 민주당 진주시당부가 4월 13일 경찰에 3·15선거 규탄 데모를 위한 집회계를 제출했으나, 기각당한 후 당원 30명이 17일까지 철야 농성을 계속했음을 보도하고, <동아일보>는 4월 14일 하오 민주당원 수십 명이 데모를 일으켰다가 20여 명이 경찰에 붙잡혔다고 했다.

◆4월 17일 시위대와 경찰의 긴박한 대치 = 4월 17일 진주에서는 시위대와 경찰 사이에 긴박한 상황이 벌어졌다.

<부산일보>는 민주당 진주시당을 중심으로 한 산청, 하동, 합천군 당 핵심 당원 24명에 의해 17일 오전 9시부터 감행할 예정이었던 데모가 이곳에 증파된 200명 경관의 삼엄한 경계 속에 민주당 진주시 당사에서 이활인 씨의 시위 선언문 낭독과 농성으로 계속됐다고 했다.

10시15분 선언문을 낭독하는 스피커 소리가 청사 밖으로 들려 나오자, 사복 경관은 당사 안으로 밀려들었고, 10명씩 짝지은 무장 경찰관은 당사 앞 10미터로 경계망을 압축, 확성기도 못 쓰게 했다고 했다.

<조선일보>는 17일 아침 8시경부터 민주당원은 머리에 ‘민주당’이라는 수건을 두르고 “3·15 협작 선거 다시 하자”, “정부는 마산 사건의 책임을 져라”는 플랜카드를 시당부 앞에 높이 세우고 경찰의 어머어마한 수비에도 불구하고 데모 강행 태세를 갖췄다고 했다.

이날 민주당은 진주 장날을 택해 데모 강행을 고집했는데, 시내 요소에 증파된 경찰관들이 경비에 눈초리를 빛내고 있어 외곽선에서 산발적으로 퍼뜨리려던 데모도 시당부 본부 시위대와 함께 완강히 저지되고 있다고 했다.

<조선일보>는 4월 17일 진주 시내 학생들의 데모 동향도 소개했다.

시내 11개 중·고등학교의 데모도 은연중 무르익고 있어 경찰은 그간 당지 진주농림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데모를 위해 마련한 플랜카드와 삐라를 사전에 압수했고, 주동 역할을 하고 있는 학생 30여 명을 진주시에서 30리 거리에 있는 청곡사(淸谷寺)에 교외 지도라는 이름 아래 수용했다.

<동아일보>는 전국적으로 데모가 가장 위험 지대로 알려지고 있는 진주에서 17일 민주당이 데모를 감행하려다가 완강한 경찰의 포위를 받아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민주당청사 앞 도로변에 앉아 농성 태세를 취하고 있다고 했다.

데모가 시작된 지 약 4시간 만인 오후 2시 경에 드디어 스크럼을 짜고 거리로 뛰어나오려 했는데, 50여 명의 사복 경찰관 및 민주당청사 주변을 둘러싼 백여 명의 무장 경찰관이 4중·5중으로 포위하고 있어, 데모대는 이 포위망을 중과부적으로 뚫지 못하고 약 30분간 충돌하다가 2시 30분경 해산되고 말았다.

경찰은 데모 군중의 가장 열성분자로 지목되는 김용하(민주당 진주시당 조직부장), 김영근 씨 등 두 사람을 연행해 갔는데, 류사원 진주경찰서장은 데모대들에게 데모만 해산한다면 이들 2명을 즉각 인계하겠다고 했다.

◆4월 18일 민주당 진주시당사 모두 부서짐 = <동아일보> 4월 19일 3쪽에는 ‘진주 데모’라는 제목으로 세로로 4장면의 사진을 수록하고서, 사진 설명을 했다.

사진 설명 끝에는 “박 본사특파원 촬영”【진주→부산 본사항공편】이라 했다.

진주에서 사진을 촬영해 그 사진을 부산으로 가져가서 동아일보 항공편에 실어 서울 동아일보 본사로 보냈음을 알 수 있다.

허만길 박사는 이런 점이 진주의 데모가 크게 주목받고 있었음을 뜻한다고 밝혔다.

<조선일보> 4월 18일 석간에는 진주의 민주당 당사가 데모를 하려는 당원들과 이것을 막으려는 경찰관과의 옥신각신 통에 당사가 모두 부서졌다고 보도했다.

당원들은 경찰의 제지로 데모는 감행치 못하고 당사에 모여 있다가 배가 고프면 밥을 서로 나누어 먹고 막걸리를 나눠 마시면서 데모를 감행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허만길 박사는 민주당 진주시당사가 부서진 기사가 석간에 보도됐고 그 이전 기사들을 고려해 보면 진주의 민주당 당사는 4월18일에 모두 부서진 것으로 판단된다고 분석했다.

당시의 기사가 실려있는 동아일보.
당시의 기사가 실려있는 동아일보.

◆비상계엄령 속 4월 25일 6개 고등학교 학생회 연합 시위 합의 = 4월 19일에는 서울에서 10만명이 시위에 참여하고 시위대가 경무대 앞까지 다가가 “이승만은 물러가라”고 외침에 따라 전국적으로 비상계엄령이 선포됐다.

이에 따라 진주 시내 중·고등학교는 4월 21일부터 26일 이승만 대통령 하야 때까지 등교 중지(휴교)가 실시됐다.

허만길 박사는 진주의 학생 시위는 3·15 부정 선거 이후 각 고등학교가 개별 학교 단위로 소규모 혹은 중규모 시위를 일으켜 왔다고 말했다.

4월 23일에는 진주 시내 6개 고등학교 학생회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여 25일과 26일에 시내 고등학교 학생회 연합으로 시위를 일으키자고 합의했다.


6개 고등학교의 위치는 도심에서 서쪽에 진주사범학교, 북쪽 비봉산 아래 진주고등학교와 진주여자고등학교, 진주여자고등학교의 남쪽에 대아고등학교, 도심에서 남쪽 남강을 건너 진주농림고등학교와 해인고등학교가 있었다. 각 학교가 휴교 중이었으므로 각 학교 학생회 위원장은 학생 비상 연락망을 통해 학생들에게 시위가 있게 됨을 알렸다.

◆진주사범학교 허만길 학생회 위원장, 경찰서장에게 총 쏘지 말 것을 요구 = 진주사범학교 학생들의 시위 준비는 4월 24일 촉석루에서 가까운 숲이 우거진 한적한 곳에서 밤늦게까지 진행됐다.

허만길 진주사범학교 학생회 위원장은 시위 학생들의 신체적 피해가 있을까 걱정이었다.

허만길 위원장은 학교 선생님들로부터 사범학교 학생들은 초등학교 교원이 될 사람들인데 정치적인 일에 지나치게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말도 자주 들었다고 했다.

드디어 4월 25일 시내 고등학교 학생회 연합 시위가 일어났다. 진주사범학교 12학급 600여명은 오전 9시 신안동 교정에 집합했다. 학생들이 긴장 속에 기백이 넘쳤다. 허만길 위원장은 ‘민주주의 만세’ 어깨띠와 ‘운영위원장’ 완장을 두르고, 대대장, 중대장, 소대장들도 완장을 둘렀다. 허만길 위원장은 단상에 올라 여러 고등학교 학생회 연합으로 시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른 배경을 간결하게 말했다. 질서를 존중하면서 애국과 정의를 한껏 외치자고 했다.

학생들의 함성이 터졌다. 허만길 학생회 위원장이 맨 앞장을 서고 대대장이 뒤따랐다. 어깨띠를 두른 학생, 구호를 선창하는 학생, 팻말을 흔드는 학생들이 각자의 역할을 했다. 버스 도로를 걸어 남강으로 흘러드는 큰 냇물의 다리를 건넜다. 높은 둑을 넘고 시가지로 들어섰다.

9시40분경 진주사범학교 학생 시위대는 진주경찰서 정문 앞에 멈추었다. 허만길 학생회 위원장과 참모들이 경찰서 현관에 들어섰다. 총을 들고 긴장했던 경찰들이 에워쌌다. 허만길 학생회 위원장이 경찰서장을 만나고 싶다고 했다. 경찰은 허만길 학생회 위원장을 서장실로 안내했다.

허만길 박사는 논문에서 류사원 경찰서장은 침착하고 온순하고 점잖아 보였으며, 나이도 많은 편이 아니었다고 기술했다.

“우리들이 시위에 나선 까닭은 서장님도 잘 아실 것입니다. 오늘은 진주사범학교 학생들 뿐만 아니라, 시내 모든 고등학교 학생들이 같은 시각에 시위를 시작한 것도 이미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나라와 국민과 진주를 사랑하는 우리들은 질서 있게 우리의 주장을 내세우기로 했습니다. 결코 총을 쏘는 것이나 폭력에 의한 충돌이 없었으면 합니다. 시위 학생들의 생명에 위협이 없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서장은 차분히 생각을 가다듬는 듯했다. 그리고는 말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소.”

허만길 박사는 4월 25일 진주의 학생 시위대 가운데 경찰서장을 만난 것은 허만길 학생회 위원장이 처음이었다고 회고했다. 경찰서장은 이보다 약 1시간 30분 뒤 오전 11시20분경 또 다른 학생 시위대와 시민 군중 앞에서 부정선거 책임 추궁을 당했다.

허만길 위원장이 경찰서장을 만난 뒤 진주사범학교 학생 시위대는 북쪽 비봉산 쪽으로 행진을 계속했으며, 남쪽으로 행진해 오는 진주여자고등학교 학생 시위대와 엇갈리며 서로 반대 방향으로 행진했다.

진주사범학교 학생 시위대는 진주중학교와 진주금성초등학교 근처에서 방향을 오른쪽(동쪽)으로 돌렸으며, 법원 로터리(현 롯데인벤스)에서 다시 남쪽으로 돌려 시내에서 가장 넓은 길을 행진하며 구호를 외쳤다. 길가의 수많은 시민들이 두 팔을 들어 만세를 외쳤다.

시민들 중에는 허만길 학생회 위원장 앞까지 달려와서 만세와 찬사를 보냈다.

진주극장 앞 광장에서 행진을 멈추고 정렬을 했다. 맞은편 중앙시장의 상인들이 몰려나왔다. 시장 입구 경전여객버스회사의 버스에 탔던 사람들도 버스에서 내려 시위대와 마음을 함께 했다. 허만길 위원장은 호주머니에서 ‘선언문’을 꺼냈다.

이 ‘선언문’은 그 당시의 잉크 글씨의 일반적 도구인 끝이 갈라진 철필로 파란색 잉크를 묻혀 붉은 줄이 큰 네모와 가로로 그어진 편지지에 썼던 것인데, 허만길 박사는 이 선언문을 46년 동안 고이 간직하다가 빛이 바래고 종이가 낡아 찢어지기 시작하자, 2007년에 발행한 수필집 <진리를 찾아 이상을 찾아> 원고에 옮긴 뒤 애틋한 마음으로 불태웠다고 했다.

허만길 학생회 위원장의 선언문 낭독이 있은 다음 진주사범학교 학생 시위대는 다시 행진하여 진주시청 앞에서 멈추었다. 허만길 학생회 위원장을 비롯해 이십여 명의 학생이 시청 안으로 들어갔다. 관권 부정 선거에 적극 개입한 기관이므로, 청사 안을 한 바퀴 돌며 팻말과 어깨띠 시위를 했다.

◆수만 시민 인파 속 학생 시위. 경찰서장, 시장, 자유당 위원장에게 부정선거 책임 추궁 = 4월 25일의 대대적인 고등학교 학생회 연합 시위에는 진주농과대학과 해인대학 학생들도 참여했다.

민주당원과 수많은 진주 시민들이 몰려와 함께 뭉쳤다.

그때 진주시의 인구는 10만 명으로 알려지고 있었는데, <동아일보>는 4월 25일 진주 시위 인원에 대해 “12시 현재 학생 데모대와 만 명을 넘는 시민으로 온통 데모의 물결을 이루었다”고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길가에 운집한 수만 시민들은 박수로 학생들을 고무했고, 민주당원들은 동 데모대 뒤에 따랐다”고 보도했다.

<부산일보>는 4월 26일 기사에서 “진주 시내 학생들은 전 시가를 뒤덮은 시민들의 인파를 헤치면서 25일 상오 10시를 기해 데모를 감행했다”고 하고서 “11시20분에 데모대는 진주경찰서에 밀려들어 류사원 서장을 불러내어 3·15부정선거의 책임을 물었다. 류 서장은 ‘자유당도 해체되는 이 마당에 나도 구국대열에 나설 각오’라고 말하자 데모대는 박수를 보내고 그 길로 시청 앞에 쇄도하여 김택조 시장을 불러 ‘부정선거의 책임을 지고 시장직을 사퇴하라’고 외쳤다. 김 시장은 ‘10만 시민이 원한다면 곧 물러나겠다’고 의사를 전하자 데모대는 다시금 동성동에 있는 자유당 시 당사에 밀려들어 문해술 위원장을 불러내고 또 다시 부정선거를 추궁했다. 문 씨는 ‘3·15진주선거가 확실히 부정선거였다’는 것을 명백히 밝히고 ‘나의 거취는 곧 성명서를 통해서 여러분의 요구에 응하겠다’고 답변했다. 이에 당사 앞에 주저앉았던 데모대는 하오 1시30분 서서히 물러갔다”고 했다.

<조선일보>는 4월 25일 석간 기사에서 “길가에 운집한 수만 시민들은 박수로 학생들을 고무했고, 민주당원들은 동 데모대 뒤에 따랐으며, 경찰은 요소요소 경비에만 신경을 쓸 뿐 데모대에는 전혀 관심을 표시하지 않았다”고 했다.

<동아일보>는 4월 26일 기사에서 “25일 상오 11시 20분경 진주농대와 농고 데모대 2천여 명은 진주경찰서 앞에 집결하여 ‘이승만 정부는 물러가라’는 푸라카드를 들고 농성하였는데, 진주서장 류사원(柳四源) 총경은 이들 데모 대원들에게 ‘천하공당인 자유당도 해체의 운명에 놓여 있고, 전 국무위원들도 사표를 내고 부통령에 당선된 이(李) 의장도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다고 나는 듣고 있다. 오늘날까지 역사 깊은 진주에서의 학생 데모가 없기를 바라고 막아 온 것은 이 진주가 평온하기를 바란 것뿐이며, 오늘 여러 학생들이 평화리에 데모한 데 대해서 고맙게 생각한다’라는 연설을 하자, 데모대는 박수를 보내면서 물러갔다”고 했다.

◆4월 26일 마지막 대규모 학생 시위, 김택조 진주시장 사임서 받아 = 진주 시내 고등학교 학생회 연합 시위는 4월 26일에도 대규모로 진행됐는데, 중학교 학생과 초등학교 학생들도 참가했다. 시위는 이날 오후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소식이 전해지기까지 진행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오전 10시20분경 하야 성명을 발표했는데, 허만길 위원장은 시위를 마치고 오후 3시경 중앙로터리와 중앙시장에 이르는 거리를 걷고 있는데, 자동차가 뿌리는 ‘호외 신문’을 통해 대통령 하야 소식을 알았다고 기억했다.

진주 시내 6개 고등학교 학생회 연합 시위의 대단원에 해당하는 4월 26일 학생 시위의 규모와 위력은 <부산일보> 4월26일과 4월27일 기사에 나타나 있다.

“26일 상오 9시경 진주에서도 남녀학생 약 3천여 명이 데모를 감행했다. 6개 고등학교 학생들이 합세한 동 데모대가 시내를 지날 때 양쪽 간선도로에 늘어선 수천 명의 군중들도 이에 호응했으며 동 데모대는 ‘최인규 전 내무장관을 처벌하라’, ‘국회를 해산하라’는 플래카드와 구호를 외쳤으며 흥분된 데모대는 반공청년단 청사와 시청 청사의 일부를 파괴했다”(4월 26일 기사)

“26일 상오 10시부터 약 2천명의 학생 데모대는 시청을 포위 김택조 진주시장, 최대현 부시장과 선거 공무원들의 사퇴를 요구하고 즉석에서 사임서를 받아 시민들에게 이를 낭독했다. 그리고 자유당 문해술 진주시당 위원장의 사퇴를 요구한 데모대는 반공청년단 사무실을 부수고 하오 3시경 해산했다”(4월 27일 기사)

■허만길 약력 : 1943년생. 시인. 소설가. 복합문학 창시. 진주중(1958년)·진주사범학교(1961년) 졸업. 국가 시행 최연소 중학교교원자격증(18살. 1961년) 및 최연소 고등학교교원자격증(19살. 1962년) 받음(‘기네스북’ 한국편 등재). 서울대학교 교육학 석사. 홍익대학교 문학박사. 정신대문제 첫 단편소설 ‘원주민촌의 축제’(1990년) 발표. 대한민국 광복 후 최초로 199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자리 보존운동 성과. 교육부 국어과 편수관·교육부 국제교육진흥원 강사·한국교육과정평가원 해외동포용 ‘한국어’ 교재개발 연구위원·학술원 국어연구소 표준어 사정위원·서울대학교 ‘국어교육학사전’ 집필위원·서울 당곡고 교장 역임. 현 국제PEN한국본부 이사.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 한국소설가협회 중앙위원. 한글학회 회원. 한국국보문인협회 자문위원. 한국신문예문학회 자문위원. 아시아태평양문인협회 자문위원. 한국문예춘추문인협회 고문
강미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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