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경남 중심지 강주진영(康州鎭營)
진주성-경남 중심지 강주진영(康州鎭營)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6.03 14:53
  • 14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경남 중심지 강주진영(康州鎭營)

진주시 정촌면 예하리 소재 강주진영의 연못, 연밭이 고려 때 조성되었다는 전설과 기록이 전해 온다.

700여 년 전에는 영웅호걸들이 모여 무술을 연마하던 군사주둔지요, 경남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곳이다.

康州(강주)마을은 진주와 서부경남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에 속하며 신라 경덕대왕 이래 1300여 년간 강주라는 지명이 변함이 없었다.

고려 시대에는 강주진이 있었고 고려 우왕 5년에 배극렴(裵克廉)이 강주에 부임하면서 경남 일원에 쳐들어와 노략질하는 왜구들을 방어하기 위해 진을 쳤다는 기록이 있어 신라 때부터 군사요충지로 지칭되며 강주 장군 유문(有文)이 후백제 견훤에게 항복했다는 기록이 있어 군사적 지리적으로 중요지였음이 확실하다.

<신증 동국여지승람>에 배극렴이 진주목사 김중광에게 토성인 진주성을 석성으로 개축토록 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는 곧 강주 못 일대로 본다.

정절공 배극렴 장군은 소윤 배현보의 아들이며 1376년 진주도원수로서 왜구를 크게 물리치고 1378년 경상도원수로 욕지도의 왜구를 대파하고 경상도순문사로 하동, 진주, 사천 일원에서 왜구를 크게 물리쳤다.

1380년 밀직부사가 되고 1388년 조전원수로 요동 정벌에 나섰고 우군도통사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도와준 인물이다. 1389년7월 하정사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1390년 회군 공신이 되고 중군 총제사로 이성계의 병권 장악을 도왔다.

조선이 개국하자 바로 1등 개국공신이 되고 성산백에 봉하여지고 문하좌시중(영의정)이 되었으니 조선시대 초대 영의정이 되었다. 신덕왕후 소생 이방석의 세자 책봉에 찬성했다.

옛적에 맨발로 따라 오는 기생을 뒤로 한 장군이 황색바람을 일으키며 적토마를 타고 강주를 떠나게 되자 그 여인이 방성대곡하는지라 산지사방에서 큰 바람을 일으켰다고 한다.

장군의 말이 잠시 멈추자 여인은 회한을 눈물을 흘리며 눈을 돌려 보니 소변을 보기 위해 멈춘 것을 알고 다시 곡성을 울리게 되었다고 한다.

장군의 소변과 여인의 눈물이 합하여 빈 영지가 연못을 이루니 지금의 강주못이라고 전해 온다.

7월 8월에 연꽃이 만개하여 관광객이 줄을 이루니 1994년 진양군수 하대창이 향토사학자의 자문을 받아 12월 31일 강주 못 입구에 고려조 ‘강주진영유지비’를 건립했다.

김수영 시장 재임 중 사각정을 건립하는 등 새로 정비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