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구분야서 인간문화재가 되기 위해 끝없이 노력
가구분야서 인간문화재가 되기 위해 끝없이 노력
  • 글 김봉철 · 사진 이용규 기자
  • 승인 2012.08.05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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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목가구 명장 김병수 선생

▲ 우리나라 전통가구 제작명장 김병수 선생은 “명석은 우리나라 전통가구의 본산이라”고 밝히고 “정작 진주보다 서울등 외지에서 명석의 전통가구를 더 알아준다”고 말했다.
진주지역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진주시 명석면은 우리나라 전통목가구의 본산이다. 우리나라 전통 목가구 명장에서부터 중요무형문화재 이수자, 경남 무형 문화재등 목가구 분야에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이다.
지금까지 전통 목가구 대회에서 입상을 한 사람들의 2/3는 진주출신들이라고 할 정도로 전통 목가구에서는 진주가 메카이다. 지금도 진주의 목가구는 진주 보다는 서울 등 외지에서 더 알아준다. 이렇게 진주가 전통목가구의 메카가 된 데는 중요무형문화재(제55호) 소목장인 故 정돈산 선생과 대아고등학교 설립자 故 박종환 선생의 공이 크다고 한다. 정돈산 선생이 무형문화재로서 진주에 자리잡고 있었고 박종환 선생이 전통 목가구를 활성화 시키기 위해 인력양성 등 다양한 노력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
이에따라 진주에 전통 목가구 인재들이 넘쳐났고 지금은 이들이 명석으로 모여들고 있다. 이러한 추세에 따라 진주시도 명석면을 전통 목가구 명소로 만들기 위해 50억원을 투자해 목가구 센터를 만들기로 하는 등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이같은 명석면 목가구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사람은 명장 김병수 선생이다. 김병수 선생은 2004년 대한민국 가구제작 명장으로 선정됐다. 우리나라에서 가구제작 명장은 3명밖에 없다. 그중에서 김 선생이 제일 젊었다. 아직 가구분야에서는 무형문화재가 탄생하지 않았다. 김 선생은 가구분야에서 무형문화재가 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김병수 선생은 현재 명석면 서현마을에서 한송공방을 운영하고 있다. 한송공방을 운영하면서 전통목가구 수작업 공예교실도 운영, 인재양성에 힘쓰고 있다.
그런데 정작 목가구를 배우려는 사람은 진주인근 보다는 서울등 외지에서 더 많이 찾아온다고 한다. 특별히 홍보를 하지 않아도 목가구를 배우려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다 알아보고 찾아온다고 한다. 배우는 교육비와 재료비, 장비가격등이 만만치 않은데도 요즈음은 여자들도 전통 목가구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로 매니아층이 형성돼 가고 있다는 게 김 선생의 전언이다. “전통 목가구는 한번 빠지면 헤어나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매력이 있어요. 특히 나무의 가치를 전통 목가구 만큼 제대로 알 수 있는 공예는 없습니다” 김병수 명장은 전통 목가구는 나무를 가치를 깨우는 일이라고 했다. “전통 목가구는 일체 인위적인 조작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나무의 무늬만으로 모양을 내기 때문에 천년이 흘러도 그 모양이 변하지 않습니다” 전통 목가구는 일체 인위적인 조작을 가하지 않고 나무 그 자체의 모양으로만 가구를 만드는 일이라는 게 김 명장의 주장이다. 실제 그의 작품을 보면 나무 무늬만으로 어떻게 저렇게 아름다운 모양을 만들 수 있는지 감탄이 절로 나온다. 무늬의 색깔도 오로지 나무의 원래 그대로의 색으로만 만들어 낸다. 검은 색은 먹감나무, 붉은 색은 참죽나무,노란색은 소태나무를 활용해 색을 낸다. 그래서 천년이 지나도 그 색이 변하지 않는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4계절이 뚜렷해서 나무의 문양이 뚜렷하다. 그래서 세계 어느나라 나무보다 우리나라 나무가 전통 목가구를 만드는데 적합하다는 게 김 명장의 주장이다. 요즈음은 오래된 나무는 보호수로 지정돼 무늬가 아름다운 재료를 구하는 게 가장 어렵다는 김 명장은 마음에 드는 재료를 구하면 그날은 하루종일 기쁨에 취해서 산다고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당시 진주 서부시장에 있는 시대가구에 취직해 가구제작의 길로 들어선 김 명장은 올해로 벌써 45년째 한길을 걷고 있다. 사람이 멍청해서 후회 같은 걸 해본 적이 없다는 김 명장은 자전거를 타듯이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왔다. 명장이 되었을 때는 그래도 자신이 걸어온 길에 대해 나름대로 국가와 사회가 인정해 준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찼다고 한다. 다음은 인터뷰 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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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손가락 두 개 잘려 절망했으나 일년의 노력으로 감각 되찾아

△악수한 손을 보니 오른손가락 두 개가 없다. 어떻게 된일인가.
-1980년도에 故 정돈산 선생 공방에서 일할 때 톱질을 하다가 잘렸다. 당시에는 접합 기술이 발달하지 못해 그대로 장애인이 됐다.
△참으로 힘들었겠다. 특히 가구제작을 하는 입장에서는 손가락이 두 개나 없으니 생명이 없어진거나 진배없었을 텐데
-그랬다. 장애인이 됐다는 것 보다는 일을 할 수 없다는 점에서 참으로 막막했다. 이제 무얼 해서 먹고사나 하는 걱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떻게 극복했나.
-걱정하고 있는데 정돈산 선생이 이대로 주저앉으면 어떻게 하느냐. 한번 해보자고 하더라. 그래서 1년동안 훈련을 했다. 다시 하는 심정으로 1년간 해보니 톱질하는 게 되더라. 인간의 몸이라는 게 참...대단하더라. 지금은 손가락이 있는 거나 진배없이 감각을 유지하고 있다.
△전통가구 명장인데 우리나라에 이 분야에 몇분이나 되나.
-전주에서 활동하는 소병일 선생과 의정부에서 활동하는 이성준 선생을 비롯해서 3명이다. 제가 제일 나중에 받았다.

우리나라 3명의 명장 중 한명이 된 것 자부심. 앞으로 인간문화재가 꿈

△명장이 되려면 어떤 자격을 갖추어야 하나.
-그 분야에서 경력이 20년 이상 되어야 한다. 경력만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기능장 이상의 실력을 갖추고 자신의 분야에서 창의력을 인정받아야 하는 것 뿐 아니라 사회에 봉사한 실적등 다양한 점을 심사해 국가에서 지정한다. 기능장 까지는 기술이지만 명장은 기술은 아니고 국가에서 부르는 일종의 호칭이다. 명예라고 보면 된다.
△김 명장의 특기는 무엇이냐.
-전통 목가구 중에서도 장롱이다. 태극문양 3층장 등 장롱이 저의 주 분야이다.
△장롱은 잘 팔리나.
-잘 안 팔린다. 1년에 하나 팔기 어려울 때도 있다.
△그런데 왜 하나.
-인간문화재가 되고 싶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이 분야에서 인간문화재가 된 사람이 없다. 그런 꿈이 있기 때문에 계속한다. 물론 천직이기도 하고.

초등학교 졸업 후 서부시장 시대가구 취직한 게 오늘에 이르러

△가구 제작을 하게 된 계기가 있나.
-계기라기 보다는 초등학교 졸업하고 나서 진학을 하지 못했다. 당시 어느 분야에 취직할까 고민하다가 서부시장에 있는 시대가구에 취직하게 됐다. 그것이 지금까지 45이 넘게 이 일을 하게 된 시작이다.
△당시는 어떤 가구가 유행했나.
-당시는 호마이카 가구가 나와 유행하던 시기이다. 따라서 전통가구는 점차 사라지는 시대였다.
△그 이후에는 어떻게 활동했나.
-시대가구에서 한 2년 일하다가 동네 형님의 권유에 따라 서울 화월곡동에 있는 백골이라는 동네에 가서 나전칠기 가구에 종사했다. 거기서 5년 정도 있다가 진주에 왔다. 진주에 예비군 훈련 받으러 왔다가 명석에 있는 강삼봉 선생을 만났다. 그게 진주에 정착한 계기이다.강 선생은 기술이 뛰어난 분이었다. 강 선생에게서 전통 목가구를 제대로 배우기 시작했다. 강선생 밑에서 80년까지 있었다. 강선생 밑에서 80년도까지 있다가 주요 무형문화재인 고 정돈산 선생의 의천 공방에 갔다. 정 선생은 상봉서동에서 공방을 했는데 정 선생 밑에서 97년까지 있었다. 정 선생이 돌아가시고 나서도 4년이나 더 있었으니 오래 있었다. 
△정돈산 선생 공방을 떠난 후에는 독립했나.
-그렇다. 한송공방으로 독립해 오늘에 이르게 됐다.

의천 정돈산 선생에게서 사사, 명장의 반열에 오르게 돼

△전통목공예를 하는 즐거움은 무엇이냐.
-진짜 마음에 드는 작품을 할 때마다 새로움을 느끼는 게 즐겁다. 전통 목공예는 나무의 무늬가 다르기 때문에 같은 작품이라도 같은 게 하나도 없다. 세상에 두 개의 작품은 없는 셈이다. 그래서 똑 같은 작품을 만들어도 만들 때마다 새롭다. 그게 큰 재미다.
△돈은 안 되나.
-전통 목가구는 돈은 안 된다. 전통 가구는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가구가 필요하면 싼게 천지다. 그런 가운데서 5천만원 정도나 가는 전통 목가구를 살 사람이 사실 별로 없다. 그래서 사실 수입은 별로 안 된다.

△가장 많이 만드는 게 무엇인가.
-3층장이다.
△3층장의 가격은 얼마나 가나.
-문양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대개 3~4천만원 정도 한다.

3층장 하나에 3~4천만원, 전통가구는 세월과의 싸움

△가구를 그만한 가격에 구입할 사람이 많지는 않겠다. 그래도 팔리나.
-그래도 사는 사람이 있다. 사실 전통 목가구는 돈을 주고도 사지 못하는 것들이다. 그런데 전통가구의 장점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가격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격이 올라간다. 일종의 소장품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돈이 많은 사람들은 투자의 면에서 구입하는 경우도 있다.
△전통 목가구의 특징이 무엇이냐.
-외국 가구가 전통 목가구에 못따라 오는 것이 있다. 재질과 문양이다. 전통 목가구는 문양을 나무 자체의 문양으로 낸다. 그래서 천년이 가도 그 문양이 변하지 않는다. 문양을 나무 자체의 문양으로 내기 때문에 재료를 구하기가 어렵다. 특히 요즈음은 좋은 문양을 내는 오래된 나무들은 보호수로 지정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더욱 어렵다. 그만큼 귀하기 때문에 좋은 재료를 구하는 날은 하늘을 날 듯이 기쁘다.

전통 가구는 재료를 구하는 게 가장 어려워

△그러면 요즈음은 재료를 어떻게 구하나.
-댐이 생기거나 도로가 만들어질 때 베어낸 나무들에서 좋은 재료가 되는 것들이 있다.
△주로 어떤 나무들을 쓰나
-먹감나무를 많이 쓰고 참죽나무,오동나무, 돌베나무등을 쓴다.
△작업은 어떻게 하나.
-저는 완전히 세월을 거꾸로 돌려 놓았다. 가구 제작하는 데 기계를 완전히 없애버리고 손으만 한다. 목수의 제일 중요한 일은 대패질과 톱질, 끌질이다. 이 세 가지만 이용해서 가구를 만든다.
△요즈음은 제자양성에 몰두하고 있다고 들었다.
-전국에서 어떻게든 알고 찾아온다. 그런데 진주 사람들은 별로 없다.
△얼마정도 배우면 되나.
-제가 배울 때는 심부름만 3년을 했는데 요즈음은 체계적인 교육을 하기 때문에 금방 배운다. 가장 빠른 사람은 8개월 정도 배워도 되는 사람이 있다.
△교육은 어떻게 하나.
-교육과정이 6단계로 나뉘어져 있다. 1주일에 한번 하는 데 2년정도 걸린다.
△주로 어떤 사람들이 배우나.
-요즈음은 이것을 배워서 업으로 하겠다는 사람은 드물다. 다 취미나 재미로 배우고 있다.

체계적인 교육으로 2년정도 배우면 가구 제작 가능

△그런데 진주시 명석면은 우리나라 목공예의 본산이라고 한다.
-그렇다. 명석에만 전통 목공예 공방이 7곳이나 된다. 저처럼 명장도 있고 중요 무형문화재 이수자도 있고 경남 무형문화재도 있다. 진주 사람들은 잘 모르는데 명석면이 목공예의 본산이다. 진주 보다 서울등 외지에서 더 알아준다.
△이렇게 된 이유가 있나.
-이유는 모르겠다. 모이라고 한 것도 아닌데 모이고 있다. 시내에서 가깝고 서울가는데 편해서 그런게 아닌가 생각한다. 진주는 원래 전통목공예의 본산이었다.
△진주가 목공예의 본산이 된 이유가 무엇인가.
-중요 무형문화재였던 의천 정돈산 선생과 대아고 설립자인 아인 박종환 선생의 공이다.
△왜 그런가.
-이분들이 제자양성을 적극적으로 했다. 특히 아인 박종환 선생이 투자를 많이 했다. 그래서 한때 전통 목가구의 붐이 일어나기도 했었다. 그때 그것을 지키지 못한 것이 한이다.
△앞으로 전망은 어떻나.
-전통 목가구는 가구이지만 예술작품이다. 그래서 소득이 늘어나게 되면 자연스럽게 다시 붐이 일어날 거라고 본다.

▲ 지난달 29일까지 진주시 명석면에서 열린 ‘제2회 비실마을 연꽃축제’에서 지역 장인들이 참여한 전통 목가구 전시회가 함께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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