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불교의 이모저모(7)-중도, 여덟 갈래 올바른 길 정사
아침을 열며-불교의 이모저모(7)-중도, 여덟 갈래 올바른 길 정사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8.23 14:45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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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대학원장·철학자
이수정/창원대 대학원장·철학자-불교의 이모저모(7)-중도, 여덟 갈래 올바른 길 정사

Katamo ca bhikkhave, sammāsaṅkappo: yo kho bhikkhave, nekkhammasaṅkappo avyāpādasaṃkappo, avihiṃsāsaṅkappo, ayaṃ vuccati bhikkhave, sammāsaṅkappo.
비구들이여, 정사유란 무엇인가? 出離、無瞋、無害를 정사유라고 한다.(잡아함경)

이른바 8정도의 한 가닥으로 ‘정사(正思, 바른 생각)’라는 게 있다. 요즘 시대 요즘 세상에 이 런 단어를 주제로 삼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는지 모르겠다. 설혹 있다고 하더라도 어쩌면 조금 ‘있어 보이는’ 불교적 지식의 하나로 내걸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나는 40여년 철학공부를 통해, 특히 내가 전공한 하이데거를 통해, 중요한 사실을 하나 배웠다. 진정한 철학적 주제는 끊임없이 그 문제의 원천으로 되돌아가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걸 하이데거는 ‘되돌아-가기’(Schritt-zurück) 혹은 ‘현상학적 환원’(Reduktion)이라 부르기도 했다. 문제의 원천으로 되돌아간다는 건 그것의 ‘왜?’를 원점에서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2000 수백년전 30대의 젊은 부처가 지금 막 입 밖에 낸, 그의 체온이 남아 있는, 그의 숨결이 느껴지는, 그의 침방울이 묻어 있는 이 단어를 생각해본다. ‘정사’, 올바른 생각이란 무엇일까? 그는 왜 여덟 갈래의 중도 중 하나로 하필 이 말을 했을까?

우선 한 가지 분명한 건, 생각(思)이라는 게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나는 하이데거를 전공하였기에 이걸 너무나 잘 안다. 그의 이른바 후기철학에서 가장 두드러진 주제 중의 하나가 생각(사유, Denken)이었기 때문이다. 이 단어가 그의 글에 그의 책에 아마 수백 번은 등장할 것이다. 물론 그 사유의 내용은 둘이 사뭇 다르다. 하이데거는 ‘존재’라는 걸 사유했고 부처는 고와 그로부터의 벗어남을 사유했다. 그렇듯 생각의 내용이 다를 수 있다는 걸 우리는 먼저 생각해봐야 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 무엇을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지, 를 우리는 생각해봐야 한다. 왜? 무엇보다 ‘바르지 못한’, ‘바르지 않은’, ‘나쁜’ 생각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게 문제를 야기하기 때문이다.

생각이라는 것도 천태만상이다. 우리 인간들은 별의별 생각들을 다 한다. 파르메니데스와 하이데거에 따르면 생각이라는 건 만유와 원천적으로 연결돼 있다. 심지어 ‘사유와 존재가 동일한 것이다’(to gar auto noein estin te kai einai)라고까지 말한다. 그러니 그 내용은 모든 존재에 걸쳐 거의 무한정이다. 생각해보자. 우선 일상적으로 우리의 생각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건, 뭘 먹을까, 뭘 입을까부터 시작해서, 이를테면 돈생각, 출세할 생각, 혹은 일생각, 시험생각…혹은 누군가에겐 님생각, 식구들 생각, 오빠생각…또 누군가에겐 나라생각, 예수님 생각,…또 누군가에겐 명품백 생각, 여행생각 주식생각, 부동산생각…혹은 누군가를 혼내줄 생각, 사기칠 생각, 죽일 생각…정말 무진장이다. 이걸 열거하자면 정말 한도 끝도 없다.

그런데 그중엔 명백하게 ‘올바르지 못한’, ‘나쁜’ 생각들도 있다. 그래서 아마 부처는 이 말을, 즉 ‘바른 생각’이라는 말을 했을 것이다. 8갈래 올바른 길의 하나로 이걸 제시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바른 생각이고 어떤 것이 바르지 못한 생각일까. 초전법륜에서 부처가 그걸 구체적으로 알려주지는 않는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건 감각적 쾌락과 고행은 바른 생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감각적 쾌락인 색성향미촉을 생각하며 그것을 탐닉한다면 그건 바른 생각이라고 할 수가 없다. 물론 앞서도 언급했듯이 이런 것들 자체가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예쁘고 듣기 좋고 향기롭고 맛있고 부드러운 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양귀비와 꾀꼬리와 라일락과 꿀과 실크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다만 그 헛됨을 알지 못하고 집착해서 괴로움을 초래하는 게 나쁜 것이다. 괴로움을 벗어나고자 하는 수행자에게는 그런 생각이 올바르지 못한 것이다. 예컨대 주지스님이 대웅전의 고급단청에 집착을 한다든지, 범종이나 처마끝 풍경의 음향에 집착을 한다든지, 불전함 향불의 향기에 집착을 한다든지, 공양의 반찬맛에 집착을 한다든지, 걸치는 가사의 감촉에 집착을 한다든지 해서 그런 생각에 골몰한다면 그건 수행 정진을 위해 올바른 생각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이걸 우리 자신의 주제로 받아들인다면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바르지 못한, 나쁜 생각들이 현실적으로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생각’이라는 것의 범위를 ‘마음’으로까지 약간 넓혀서 생각한다면 더욱 그렇다. 이른바 탐진치(탐욕(貪, rāga)・성냄(瞋, dveṣā)・어리석음(痴, moha)) 3독(三毒, triviṣa)도 다 그 나쁜 생각에 포함될 것이다. 온갖 범죄적인 생각들도, 온갖 부도덕한 생각들도 다 거기에 포함될 것이다. 그러니, 먼저 그런 생각들을 걷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어느 것 하나도 쉽지는 않겠지만!

그런데 그런 생각들을 걷어냈다고 곧바로 목표에 도달하는 걸까? 해탈을 하게 되는 걸까? 그건 아니다. 적극적으로 ‘바른 사유’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게 뭘까? 위의 인용이 친절하게 그 답을 알려준다. 예컨대 출리(出離), 무진(無瞋), 무해(無害)가 바른 생각이라는 것이다. 즉 생사를 벗어나려는 생각, 성냄이 없는 생각, 해치지 않으려는 생각(번뇌와 집착이 있으나 선취로 향하게 하는 세속의 바른 사유(잡아함경)), 이런 게 바른 사유다. 그리고 그런 연장선에서 우리는 3법인 4성제 등 부처의 저 모든 생각들을 내것으로 받아들여 공유할 필요가 있다.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그런 방향으로 만일 걸어가고 싶다면. 괴로움을 느끼고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그 끝에 아마도 저 고요한 해탈의 문이 있을 것이다.

만일 나쁜 생각들에게 내 마음의 빗장을 열어준다면, 그 순간 그것들이 마치 가스나 물처럼 스며들어 우리는 번뇌를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살아본 우리는 이미 알지만, 그 번뇌가 어디 108개 정도로 끝나겠는가. 거의 무한정이다. 그래서다. 그래서 바른 생각, 이것이 해탈로 가는 길이 되는 것이다. 벗어날 생각을 하고, 화내지 말고, 해칠 생각을 하지 말자. 그게 첫발을 떼는 것이다. 이것만 해도…사실 극락정토가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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