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불교의 이모저모(9)-중도, 여덟 갈래 올바른 길 정업
아침을 열며-불교의 이모저모(9)-중도, 여덟 갈래 올바른 길 정업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9.20 15:59
  • 14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수정/창원대 대학원장·철학자
이수정/창원대 대학원장·철학자-불교의 이모저모(9)-중도, 여덟 갈래 올바른 길 정업

‘업’(業)이라는 글자에 대해 관심을 가져본 적이 있는가? 나는 한평생 학교선생으로 살아온 터라 ‘업’이라는 이 글자에 대해 무심할 수 없다. 학교선생은 ‘수업’이라는 것을 기본 업무로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업도 수업이지만 그것과는 별도로 나에게는 이 ‘업’이라는 말이 준 어떤 특별한 인상이 있다. 아득한 옛날 고등학교 시절 불교와 관련해 ‘업장’이니 ‘업보’니 하는 이야기를 처음 들으면서 이게 우리네 인생에 대한 참 기발한 설명도구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우리의 일거수일투족 모든 행위들은 시간이 지난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소위 업(karma)으로 쌓이고(業障) 그것에 대해 반드시 응분의 결과가 뒤따른다(業報)는 것이니, 이게 우리의 모든 화복에 대한 완벽한 설명이 되는 것이다. ‘지금 네가 이런 건 다 너 자신이 한 짓의 대가인 거야…’ 그런 식이다. 더욱이 ‘특별히 나쁜 짓 한 게 없고 선량하게 성실하게 살아왔는데도 지금 내가 왜 이런 불행을 겪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 때도, 여기에 소위 윤회전생이라는 장치가 추가로 작동하면서 전생의 업보 운운하면 더 이상 할 말이 없게 되는 것이다. ‘그건 다 전생의 업보인 거야…’ 그러면 어떤 복에 대해서도 어떤 화에 대해서도 완벽한 설명이 된다. ‘햐~ 참, 인도사람들…’ 혀를 내두르며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확인할 수야 없지만 이게 정말 진실이라고 전제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일체 행위들에 대해 그 선악을, 혹은 옳고 그름을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게 다 업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부처의 이른바 8정도 중 하나인 ‘정업’(正業, 바른 행위)이라는 것을 주목하게 된다. 올바른 업, 올바른 행위. 그런데 그게 뭘까? 구체적으로 어떤 게 올바른 행위일까? 고맙게도 우리는 부처 본인으로부터 그 설명을 들을 수가 있다. <잡아함경>에서 그는 정업을 이렇게 설명해준다.

어떤 것이 바른 행위인가? 바른 행위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세속의 바른 행위로 번뇌와 집착이 있으나 선취로 향하게 한다. 다른 하나는 세속을 벗어난 지혜로운 자의 바른 행위로 번뇌와 집착이 없고 괴로움을 바르게 다하여 괴로움의 소멸로 향하게 한다.

세속과 탈세속 두 차원의 바른 행위가 일단 구별된다. 그런데 우리는 세속에 있으니 일단 세속의 그것이 먼저 관심사가 된다.

Katamo ca bhikkhave, sammākammanto: yā kho bhikkhave, pāṇātipātā veramaṇī adinnādānā veramaṇī abrahmacariyā veramaṇī, ayaṃ vuccati bhikkhave, sammākammanto.

비구들이여, 번뇌와 집착이 있으나 선취로 향하게 하는 세속의 바른 행위(正業)란 어떤 것인가? 이른바 죽이는 것, 도둑질, 음행, 이것을 떠나는 것을 일러 세속의 바른 행위라고 한다.

이게 그 설명이다. 아주 구체적인 언급이다. 죽이는 것, 도둑질, 음행을 하지 않는 것이다. 한어로는 이를 살생, 투도, 사음이라고도 말한다. (기독교로 치면 십계명과 일부 겹친다.) 최소한 이런 나쁜 짓을 하지 않는 게 올바른 행위(정업)라는 말이다. 쉽게 납득이 된다. 이 세 가지가 바르지 못한 신업(身業)의 대표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예로 들어 말하는 것이다. 이게 저 먼 2000 수백 년 전의 인도에서 있었던 일들임을 생각해보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하는 짓들이란 참…

그런데 이런 건 아주 구체적으로 우리 눈앞에 그 장면을 그려봐야 한다. 혹은 나 자신이 그 피해자라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러면 이게 바르지 못한 업이라는 데 대해 더 이상의 어떤 설명도 필요 없을 것이다. 이중 어느 하나에라도 걸린다면 그건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된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엔 실제로 무수한 살인이 저질러진다. 연쇄살인도 있고 심지어 전쟁과 테러 같은 대량 학살도 있다. 강도와 도난은 거의 일상다반사다. 불륜도 너무나 흔해 이젠 법적으로 죄도 아니게 되었다. 심지어 강간도 부지기수다. 어디 이 세 가지뿐이겠는가. 바르지 못한 행위는 열 손가락으로도 모자란다. 이런 악행론을 일일이 펼치자면 열 손가락이 아니라 천수관음의 만 손가락을 다 동원해도 모자랄 것이다.

나는 불교의 매력이랄까 설득력 중의 하나가 그 구체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이렇게 나쁜 짓을 구체적으로 일러주며 이런 짓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해탈로 가는 길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마치 저 포퍼의 ‘단편적 사회공학’과 구조적으로 흡사하다. ‘추상적인 선의 실현을 위해 힘쓰기보다 구체적인 악의 제거를 위해 힘쓰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빼기를 해나가다 보면, 혹은 지우기를 해나가다 보면, 그 끝에 어떤 청정한 무언가가 남을 것이다. 그게 꼭 영롱한 사리가 아닌들 어떠리. 살생과 투도와 사음이 없어진 곳, 그런 곳이라면 그것만 해도 제법 극락정토에 가깝지 않을까, 그런 상태라면 저 해탈이라는 것도 상당히 가까이에 와있지 않을까, 현실 속에 가득한 그런 ‘바르지 못한 행위들’을 고려해보면, 그런 생각도 해보게 된다. 세상의 혼탁과 해탈의 청정 사이, 그 거리는 과연 얼마나 될까. 한 발짝 거리일까 혹은 구만리 먼 길일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