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언어의 생산과 소비
아침을 열며-언어의 생산과 소비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11.01 15:04
  • 22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수정/창원대 대학원장·철학자
언어의 생산과 소비-이수정/창원대 대학원장·철학자

최근 개인 통산 30번째 책을 낸 후 재미 삼아 그 졸저들을 다 모아 책상 위에 나란히 꽂아보았다. 연구서, 해설서, 에세이, 시집, 번역…종류도 엄청 많다. 돌이켜보니 그게 내 인생이었다.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묘한 상념에 빠져든다. 문득 ‘언어의 생산’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이런 건 몇 차 산업에 해당하는 걸까… 나는 철학자로서 이런 종류의, 즉 언어의 생산-유통-소비가 농산품이나 공산품의 생산-유통-소비 못지않게, 아니 부분적으로는 그것들보다 더 중요한 철학적 의미를 갖는다고 평가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그 ‘정신’의, 그리고 세상의 ‘질-격-수준’을 결정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질-격-수준’, 이것은 내 평생의 학문적 관심사요, 주제요, 목표였다. 기본인 강의와 강연과 논문을 제외하고도 나는 그것을 위해 나름 애썼고 일정 부분 기여했다고 자부한다. 그 구체적인 형태는 주로 ‘책’이었다. 그중 적지 않은 것들이 이른바 우수도서로 선정되었고 어떤 것은 한때 이른바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고, 또 어떤 것들은 이른바 중앙 일간지에 전면 기사로 다루어지기도 했다. 학자로서는 대단한 영광인 셈이다. 나는 그것을 써준 기자 분들에게 한량없는 고마움과 존경을 느낀다. 그 ‘언어의 유통’에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어떤 종류의 생산물도 그것이 유통되고 소비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창고의 공간을 차지하는 짐일 뿐인 것이다. 책이라는 언어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사회에서는 이것이 제대로 유통-소비되고 있을까? 누가 ‘그렇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을까?

서울에서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무심코 차내를 둘러보았더니 거의 전원이 고개를 숙인 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서울로 가는 KTX에서도 같은 풍경이었다. 일부러 본 것은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오는 화면을 보니 N**, K**, U**, T**, 혹은 뉴스나 게임 스포츠 등, 대동소이, 천편일률, 대부분 그 범위가 뻔했다. 그런 소비를 통해 관련 회사들은 천문학적인 부를 지금도 축적하고 있겠지만, 나는 그 언어들의 내용을 생각하면서 머리가 무거워지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소비되는 언어의 종류가 우리 세대, 우리 시대와 너무나도 달라져 있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인간의 종류도 너무나 달라져 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경제학의 원리는 언어시장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인문・교양 등 고품질 고품격의 언어들은 우선 소비시간에서도 밀려난다. 대부분의 소비자가 폰을 들여다보면서 책을 읽는 시간은 점점 짧아졌고 이젠 거의 제로에 가까워졌다. 차 안에서 책을 읽는 사람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이미 천연기념물, 혹은 멸종위기 동물이 되어버렸다. 있다고 해도 거의 빈사상태다. 글과 책은 이제 ‘수다/잡담’에게도 밀려나고 있다. 참으로 초라한 신세다. 젊은 세대는 신문도 읽지 않는다고 한다.

심지어 TV도 보지 않는다고 한다. 단편적이고 자극적이고 경박한 언어들이 판을 진다.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다. 그런 언어들이 판을 치면, 이윽고 그런 사람들이 늘어나고 이윽고 그런 세상이 되고 만다는 것을. 이미 그렇게 되어가고 있음을 도처에서 목격한다. 질 높은, 격조 있는, 수준 높은 언어들은 점점 설 자리를 잃고 밀려난다. 버려진다. 위기다.

나는 철학자로서 이 시대를 향해 경고한다. 시선을 돌려야 한다. 지금 당신의 눈은 무엇을 읽고 있고 당신의 귀는 무엇을 듣고 있고, 당신의 입을 무엇을 말하고 있고, 당신의 손을 무엇을 쓰고 있는가. 당신은 지금 어떤 언어를 소비하고 있는가. 지금 우리사회에서는 어떤 언어들이 생산-유통되고 있는가. 공자의 언어, 부처의 언어, 소크라테스의 언어, 예수의 언어, 문사철의 언어, 그런 것들은 지금 어느 창고에 재고로 쌓여 먼지를 뒤집어쓴 채 잊혀져 있는가. 나는 이미 여러 차례 말한 바 있다. 어떤 세상에서 어떤 사람으로 어떤 삶을 살 것인지는 우리 자신의 선택이고 우리 자신의 책임이다. 걱정스럽다. 이대로 가면 낭떠러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