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21세기 불교
아침을 열며-21세기 불교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12.06 13:59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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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대학원장·철학자
이수정/창원대 대학원장·철학자-21세기 불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어쩌다 보니 최근에 불교에 관한 책을 한권 내게 되었다. 우연이지만 아내도 외국소설을 한권 번역했는데 그것도 내용이 불교적인 것이었다. 그런 인연으로 한동안 불교가 내 관심의 한켠에 머물렀다. 참고로 나는 불교 신자도 아니고 불교 전공자도 아니다. 나는 서양철학>독일철학>현대철학이 전공이다. 그런데 참 묘하게도 불교는 항상 내 삶의 한 배경에서 얼찐거린다. 수년 전 미국 보스턴에서 연구년을 보냈을 때는 살던 집 바로 이웃에 숭산스님이 세운 ‘대각사’(Cambridge Zen Center)가 있었다. 평생을 함께 봉직한 동료 교수님 중에도 불교 전공자가 있었다. 제자 중에도 출가해 승려가 된 이가 있다. 아무튼 이런저런 이유로 나는 불교와 무관하지 않다.

때마침 유명인사인 혜○스님과 현○스님 사이에 ‘소유’를 둘러싼 공방이 전개되었다. 둘 다 하버드 출신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공통점이 있다. 연예인 수준의 인기를 끌던 분이라 화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혜○은 한국 출신 미국인이고 현○은 미국 출신 한국인이라는 것도 흥미롭다. 현○스님은 혜○스님을 거친 말로 비난했다. 혜○스님은 활동을 중단했고 현○스님은 참회한 그를 ‘아름다운 사람’이라며 사태를 수습했다. 혜○스님이 방송에 공개한 멋진 뷰의 9억짜리 집이 논란의 기폭제가 된 모양이다. 미국 국적에 UC버클리 학사 하버드 석사 프린스턴 박사에 대학교수라는 화려한 경력에다 잘생긴 외모 그리고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방송활동의 인기까지 갖춘 그는 ‘풀소유’ 혹은 ‘너무소유’라는 말로 비아냥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스님들이 자가를 소유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은 모양이다. 그런 걸 ‘토굴’이라 부르기도 하나 본데 나는 불교 전문가가 아니라 전혀 모르고 있었다. 스님의 집? 낯설었다. 의외였다. 하긴 내가 유학시절 10년 세월을 살았던 일본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하등 이상할 것도 없다. 동네 곳곳에 있는 사찰에는 응당 집이 함께 있었고 그 주지는 대단한 부동산을 소유한 부자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한국은 다른 줄 알았다. 누구보다도 법정스님의 ‘무소유’가 유명했으니까. 그리고 내가 아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철저한 무소유를 실천했으니까, 불교 승려는 응당 ‘내 집’을 갖지 않는 게 기본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참회하고 방송 활동을 중단한 혜○스님을 새삼 문제 삼을 생각은 전혀 없다. 그는 현○스님의 비판으로 이미 작지 않은 상처를 입었을 테니까. 다만 나에게는 두 가지 생각이 교차한다. 하나는, 불교는 언제나 어디서나 부처의 가르침을 벗어나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시대가 변했으니 스님이 스펙을 쌓고 집을 갖고 연예활동을 하는 것도 하나의 방편으로서 의미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 두 생각은 상반된다. 심경이 복잡하다.

교과서적인 정답을 말하자면 소유와 인기를 추구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위배된다. 그것은 헛된 것이며 그 헛된 것에 대한 갈애는 고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을 버려야 한다. 버려서 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것이 불교의 알파요 오메가다. 그렇게 본다면 혜○스님은 현○스님의 표현대로 배우이고 사업가고 기생충이 맞다. 스님이란 자가 제대로 도는 안 닦고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느냐고 비난받을 수도 있다.

다만, 이른바 ‘열반’의 경지에 다다르기까지는 모든 스님들도 다 수행자임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과정에 있는 학생인 것이다. 아직은 부처가 아닌 것이다. 일반 스님을 부처로 여긴다면 그건 큰 착각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혜○스님의 논란된 일들도 다 이해될 수 있다. 그 모든 것을 다 ‘방편’으로 이해한다면 거기서 얼마든지 긍정적인 의미를 발견할 수도 있는 것이다. 잘생기고 유식한 혜○스님으로 인해 보통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불교’라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된다면 그것 자체만으로도 작지 않은 공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보통 계기라고 부르는 것을 불교에서는 인연이라고 부른다. 그런 진리적 구조는 2000 수백 년 전 고타마 싯다르타의 시대나 혜○스님의 21세기나 전혀 다를 바가 없다.

혜○스님이 그저 단순한 연예인이 아니라 불교 승려라는 점으로 인해 사람들이 불교를 친근하게 생각한다면 그런 생각 자체가 한 톨의 씨앗이 되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어떤 싹을 틔울 수도 있다. 그게 어떻게 자라 울창한 한 그루의 보리수로 커 가게 될지, 어떤 열매를 맺게 될지, 그건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적어도 그것이 이 시대를 가득 채우고 있는 저 혼탁한 욕망의 미세먼지보다는 더 청정한 그 무엇이라는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우리는 저 부처님처럼 염화시중의 미소를 띠면서 혜○스님의 향후 행보를 지켜보기로 하자. 그가 제대로 된 보리수행을 거쳐 진정한 깨달음에 도달하기를 나는 차분히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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