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이주혜의 ‘자두’를 읽고
아침을 열며-이주혜의 ‘자두’를 읽고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1.01.05 15:30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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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소설가
강영/소설가-이주혜의 ‘자두’를 읽고

이주혜 소설 <자두>를 단숨에 읽었다. 단숨에 읽은 이유가 비교적 뚜렷하다. 소설 도입부에 드러나는 작가의 간절함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어떤 식으로 대화를 나누고 어떤 식으로 서로 ‘이해받고’ 있다고 느꼈는지, 미치도록 알고 싶었습니다” 나 역시 그것이 미치도록 알고 싶은 까닭이었다.

너 나 없이 우리는 이해받고 싶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의 이해는 종종 목숨과 맞바꾸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이해는 그것이 부정당했을 때는 사랑의 종말일 테고 긍정일 때는 사랑의 성취로 이어지는 게 그 이유다. 자두를 읽는 내내 과연 완전한 이해에 도달할 것인가가 단숨에 읽은 까닭이고.

자두를 다 읽은 이로써 결론부터 말하자면 소설은 끝까지 완전한 이해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보다 적어도 소설 속에서는 완전한 이해는 없었다라고 말한다. 그렇지, 참으로 참담한 결론이 아닐 수 없다. 하물며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의 완전한 이해는 봄볕 아래 눈사람처럼 처절하게 무너져 내린다.

따라서 너무 열심히 읽은 마음도 처절하고 허망하다. 그리고 외롭다. 우리는 얼마나 이해를 고파했는가 말이다. 이웃의 이해, 친지의 이해, 가족의 이해, 게다가 연인이나 배우자의 이해에 얼마나 목을 매는가. 혹시나 하고 이해받고 이해할 방법을 조금이라도 배울까 했다가 배반당한 마음이다.

다행히 작가 이주혜는 외로운 독자를 위로하기나 하는 것처럼 완전한 이해를 소설 앞뒤에 장치해 두었다. 앞에는 엘리자베스 비숍과 에이드리인 리치라는 두 여성시인의 완전한 이해를, 뒤에는 은아와 영옥이라는 두 여인의 이해를 서술하고 있다. 물론 후자는 불완전하고 불안한 이해이지만.

영옥과 은아의 이해가 불완전한 건 그녀들의 정체성 확보가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정체성 확보는 결국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으로 ‘살아야’ 확보되는 ‘무엇’이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각자 자기 정체성으로 살기는 매우 어려운 게 현실생활이다. 하물며 불완전한 정체로는 판판이 좌절한다.

주인공 은아의 정체성 확보가 완전하려면 시아버지와의 관계에서 확보점을 찾아야 했다. 손주를 바라는 시아버지가 며느리 은아의 눈치를 보면서도 대놓고 말하지는 않은 선의가 그 점이었다. 그에 대해 은아가 화답하든 배반하든 치열하게 정면 대응해야 하는 게 인생이다. 그냥 ‘당했다’고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기엔 인생은 다채롭게 강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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