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민칼럼-66년 이별 칠암벌에 시작 꿈 경상국립대학교
도민칼럼-66년 이별 칠암벌에 시작 꿈 경상국립대학교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1.01.28 15:59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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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원/경남과학기술대학교 명예교수·남강문학협회장
김기원/경남과학기술대학교 명예교수·남강문학협회장-66년 이별 칠암벌에 시작 꿈 경상국립대학교

경남과학기술대학교와 경상대학교의 통합문제는 그동안 몇 차례 거론되었으나 번번이 무산되었다가 다행히 양 대학교의 합의로 66년 만에 칠암 벌 제자리로 돌아오게 됨을 환영하는 바이고 많은 관심을 모았다. 필자는 두 대학교의 유전자는 둘이 아니고 하나임을 증명할 수 있다. 근거리에 존재하며 개교 목적은 새 농업교육의 산실로 새 역사를 창조하면서 더 넓게 새로의 발전한 과정의 차이뿐이다.

그러나 진주시 입장을 볼 때 한 지역에 국립 기관이 1개보다 2개 있는 것이 도시 위상 평가에 우위를 차지하는 이점이나 대학교 발전과 미래상을 볼 때 원위치로 돌아오는 것에 원칙이지만 너무나 변태의 세월이 경과된다. 이번 통합은 시대의 변혁에 따라 진주시민이 묵인하여 이룩한 결과이고 선진화된 진주시민 정신이 한결 자랑스러워 축하를 보내고 싶다.

103년 동안 한국 농업 산실로 인재양성의 원산지로 농경문화 부흥 역사를 가꾸어 왔던 진농 산 뜨락 개척자 동문 제위님께도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사실 큰일은 시대가 결정한다는 명언처럼 시대와 미래에 따라 언제가 통합이 가능할 유전자가 존재하면 어떤 계기가 오게 되면 ‘칠암 벌로 돌아올 것이다’ 예측한 어른들의 예언이 이번에 완성된 것 같다.

필자가 농림고등 부터 대학교까지 재직하면서 학교 연년 재정리 과정을 맞아 두 대학교의 수난사를 선배 어른의 이야기와 1957년 진주농대 입학을 위해 고교 은사(故 이규석 교수 교무과장)의 안내로 들었던 수난 이야기는 동일 유전자 속에 일어난 안타까운 사실도 청취한 바 있었다.

양 대학교의 유전자는 1896년 2월 갑오경장이 일어나자 조선은 사회의 모든 분야에 계획과 개방이 시작되어 1897년 10월 대한제국을 선포하자 서양 예술문화 유입이 공식화되자 진주 역시 그 영향으로 우선 계급적 신분 사회가 평등사회로 바꾸었고 향교교육이 신교육제도로 개방되고 옷차림 등 생활방식이 자유로워 개방되자 조선조 중종 때 영남 선비들이 모여 교육하였던 곳이 낙육제(樂育齊)였다.

그 후 경상도가 경남도 경북도로 나눠질 때 낙육제 기능이 퇴색되어 문을 닫을 직전 밀양의 부호 박 씨란 분이 쌀 600석을 투자해 1898년 낙육고등학교를 개원하여 교감으로 취임하고 약 1년 몇 개월 동안 신교육을 개설한바 외세 압력과 내부 사정으로 낙육고등학교가 폐쇄될 무렵 그 자리에 구한말 신 농업교육 정책 사업으로 전국 5개 지역에 공립 신 농업교육기관이 세워질 때 1910년 4월30일 경술국치 직전 진주농림학교가 개교된다.

칠암동(옛 지명 잠종장)에서 진주시 칠암동 150번지 현 위치로 이전했고 초대 교장에 경남도농사원장이 1년간 겸임 교장에 취임했다가 목표목화시험 장으로 전출된 이후 7대까지 일본인 교장, 해방 이후 1대 황운성 교장이 취임했다. 1945년경 농고를 폐교하고 농과대학으로 승격하지는 의견이 일어나자 원로 동문과 시민, 학생 대표로 구성된 추진위원회가 결성되고 본격적 모금 운동을 전개했는데 진주농림학교 학생들이 대학 발기에 적극 후원과 모금에 참여하여 방학 때 귀가하는 학생은 모금증서 10장씩 배부 농고 생 부형들이 대거 참여한 것은 농림학교가 대학이 된다는 부품 꿈이 모두의 희망이었다.

진주농림학교 강당(현존 진농관)에서 예정대로 1948년 10월20일 초급 진농과대학으로 개교된다, 농학과 38명 학생 가운데 대부분 진주농림학교 출신이고 1949년 5월 제1회 38명 졸업이 배출된다, 그런데 전규대학 졸업자는 대학 전임 겸직 발령되고 고등학교 졸업자 교사는 그냥 남게 되는 갈등 골이 깊어졌다.

또 ‘농림학교가 폐교되면 농림학생은 갈 곳이 없다’는 격화 말들이 유행될 무렵, 농과대학 신축교사를 짓기 위해 과수원(현 도서관) 자리에 신축 교사 기공식 과정에 학생들이 농구창고의 농구를 이용해 기공식장을 쑥대밭을 만들어 무산되고 이어 교문 앞 진주농과대학, 간판마저 철거된 이후부터 농과대학 배격 운동이 격화되자 추진위회측은 1949년 6월 진주농림학교내 농과대학 건물을 신축 안 한다는 공개서한과 사과문 이후 좀 조용했다 농림학교 포장 밖을 중심 땅을 몰세하는 과정에 학제변경, 6·25동란을 맞았다.

1952년 수복된 후 8월 2대 진주농과대학장 황운성이 취임되고 1953년 2월 4년제 허가와 더불어 진주농과대학 부설 진주농림고등학교로 교명이 발표, 농과대학 강의실을 본관 뒤 기숙사를 개조하여 강의실을 마련하게 된다.

1954년 진주농과대학 부지 확보 비용 2차 모금과 교명 변경에 농고생의 협조를 당부한바 역으로 배격운동이 격화되자 1955년 3월 진주농과대학은 칠암동 92(현 의과대학) 새 교사로 이전함으로 완전 분리되어 오늘 날까지 각자로 성장 발전을 도모하였다가 다시 칠암 벌로 돌아오기까지 66년 생이별한 셈이다.

필자는 과거 역사를 두고 논쟁을 하자는 것 아니고 칠암 벌에 시작하는 꿈자리가 명실상부한 경남을 대표하고 나라에 거점 국립 종합대학교를 기반을 마련하여 국내 10위권, 세계 100위권 대학교로 발전하는 칠암 벌에 시작의 꿈을 가지도록 가꾸는 것이 대학의 목표이고 지방민의 소원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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