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내가 포상케 한 하동 항일투사
진주성-내가 포상케 한 하동 항일투사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1.02.24 15:59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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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내가 포상케 한 하동 항일투사


경남 하동지역 항일 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분이 수백여 명이 넘지만 정부포상이 추서된 분은 67명이다. 내가 직접 나서 자료를 수집하고 신청서 작성, 이력서 작성, 제출 등을 진행한 결과 12명의 정부 포상이 성사되었다.

하동읍 강우석 선생은 3번 옥고를 치렀으나 미포상임을 알고 자료 수집, 작성, 제출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케 했다. 강우석 선생은 연세대 재학 중 3·1운동에 참여하고 정학 처분 되었고 진주와 마산에서 미숀계통 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군자금 모집, 신간회 활동, 동아일보 기자로 활약했다.

양보면 김홍권 선생은 진주농업학교 재학 중 안희제, 이원식 등과 대동청년단에 가입, 활동하고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국회의원)에 선출되었고 부산 동래군에서 산해관 사장으로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제공하는 등 활동으로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유명국 의병장은 하동군 옥종면과 산청 덕산 일원에서 의병장으로 크게 활동하고 1906년 덕산에 의병본부를 설치해 전투하고 옥고를 치르고 1995년 건국훈장 에족장이 추서되었다.

하동군 화개면에 거주한 이강률, 임만규, 이정수, 김주석, 이정철, 정상근, 양봉근 청년들이 화개 장터에서 1919년 4월6일 처음으로 시위하고 4월 11일 협박문을 면사무소 정문에 붙이고 또 시위하려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6~10개월 징역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이정수 선생은 건국 포장이 추서되고 이강률, 임만규, 김주석 선생 등은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2001년 3월 화개장터 3·1운동 기념비건립 추진위원장으로 활동했음을 밝힌다.

하동군 양보면 정섬기 선생은 진주농업학교 졸업 후 교사 근무 중 하동읍 3·1운동을 지도하고 징역 6월형이 언도되었고 정성기 선생도 하동읍 3·1운동을 지도하고 징역형이 언도되었고 두 분 모두 대통령 포창이 추서토록 했다.

추홍순 선생은 하동군 금남면 출신으로 고전면의 일신단 일원이 되어 고전 3·1운동과 진교 3·1운동을 지도한 공적으로 1997년에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하동군 옥종면 조정래 선생은 진주고보 재학 중 동맹휴교를 주도하고 퇴학 처분을 받은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반제동맹 등을 조직해 활동 중 일경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으로 옥고를 치르다 옥중 사망해 2008년 8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케 해 드렸다.

여성 항일투사 정금자 선생은 진주여고 재학 중 광주학생운동에 동참해 전단지를 배포하고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므로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하동군 금남면 정몽석 선생은 진주 3·1운동을 지도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1년간 옥고를 치르고 최웅림 등과 김천 등지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 중 또 체포되어 2년간 옥고를 치르고 백정 해방운동을 전개하고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기도 했으므로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박치화 선생은 유족이 수차례 포상 신청해도 불가통보를 받았으나 도우미역할로 2007년 건국훈장이 추서되었고 향리에 축하 현수막을 달아 드리고 일간지에 기고했다.

나는 하동군지를 편찬할 때 독립운동에 관한 자료를 제공했으며 <하동독립유공자공훈록>을 자료 수집 및 저술해 전국 도서관에 배포토록 했다.

하동군 인터넷 사전을 만들 때 17개 항목을 기록해 제출함으로서 관광지와 항일독립운동에 관한 자료를 찾기 쉽도록 했다.

신간회 하동지회. 하동청년회 활동상. 국채보상운동 등을 처음으로 찾아 발표했으며 항일의 고장임을 널리 홍보하는 역할을 했다.

하동군 청암, 옥종 일원에서 활동한 아들을 기리는 항일투사추모비 건립을 처음으로 제안하고 건립부위원장과 자문위원으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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