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조선이 독립하기 전에는 술·담배를 않겠다
칼럼-조선이 독립하기 전에는 술·담배를 않겠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1.03.08 15:08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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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조선이 독립하기 전에는 술·담배를 않겠다

조선이 독립하기 전에는 술·담배를 않겠다.

위 말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겸 저술가인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 1886~1947·61세) 선생이 조선의 독립을 기원하면서 다짐하고 평소 몸소 실천한 말이다. 3월 독립운동의 달을 맞이하여 2회에 걸쳐 몽양 선생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그를 수태했을 당시 조부(여규신)의 꿈에 ‘태양이 떠오르는 꿈을 꾸고 낳았다’ 하여 아호를 몽양(夢陽)이라 했다고 한다. 선생은 구한 말 평등사상을 수용하여 노비들을 해방시키고, 교육·계몽 활동을 하다가 1907년 대한협회에서 주최하는 강연회에서 안창호의 연설에 감화되어 독립 운동에 투신했다.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 임시 정부 외무부 차장. 중화민국과 러시아를 오가면서 쑨원의 권유로 중국 국민당에 가담해 국공합작을 통한 중국 혁명 운동과 반제국주의 운동에 활동하였다. 1920년대 초중반 중국 상하이에서 동아일보의 상해 주재 촉탁 통신원과 타스 통신사 직원으로 지냈으며, 1929년 7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송환된 이후에는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국내에서는 1933~1936년까지 조선중앙일보사의 사장을 지냈다. 조선체육회(대한체육회의 전신) 회장과 미군정기 군정청 체육부장을 지내기도 했다.

1936년, 베를린에서 올림픽 개최가 정해지고 손기정이 일본 측 대표 후보가 되자 손기정은 ‘굳이 이 대회를 나가야 되느냐’고 여운형에게 물었다. 여운형은 “일장기를 달고 가지만, 등에 한반도를 짊어지고 달린다는 것을 잊지 말라”며 출전을 권하여 손기정은 마라톤 대회에서 1등을 하여 금메달을 딴다. 이 일은 각계 언론사들에 의해 보도되었는데, 그 중 조선중앙일보는 누구보다 먼저 손기정 선수의 활약을 극찬하였고, 1936년 8월13일자 조선중앙일보에 손기정의 일장기를 쓱싹 지운 사진을 실었다. 중앙일보는 인쇄기 품질이 좋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장기가 지워진 건지 안 지워진 건지 총독부가 알아차리지 못해서 검열을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인쇄기의 품질이 좋았던 동아일보는 이걸 따라하여 8월25일자 신문에 실었다가 총독부의 검열에 걸리게 되었고, 조선중앙일보가 이를 먼저 시도했음이 밝혀져 두 신문 모두 정간되었다. 이 일로 조선중앙일보는 자진휴간 된 뒤 한동안 복간되지 않았다.

1944년부터는 비밀 지하 독립 운동 단체인 ‘건국동맹’과 ‘농민동맹’을 결성, 해방 뒤 1945년 8월 안재홍, 박헌영 등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 9월 조선인민공화국을 결성하여 혼란 수습과 치안 유지 등의 활동을 했다. 1946년부터는 김규식, 안재홍과 함께 통일 임시 정부 수립을 위해 좌우 합작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이를 반대하는 좌·우익 양측으로부터 테러를 십여 차례 당했으며, 좌파 단체의 주도권을 놓고 박헌영 등과 경합했다. 여운형은 1945년 광복 이후부터 정치 테러를 수차례 겪었다. 1929년 중국에 있을 때 정치테러 2차례, 1945년 8월 광복 이후부터 1947년 7월 암살되기까지 2년간 총 10차례 테러를 당했는데 이는 정치테러사에서 전무후무할 정도로 최다 기록 수준이다. 직접적인 테러뿐만 아니라 협박전화와 편지·비방 벽보·심지어 살인을 교사하는 신문 기사까지 존재했다.

1947년 7월19일, IOC가입 축하기념 으로 서울 운동장에서 한국과 영국의 친선축구경기가 열린 날, 당시 체육부장관이던 여운형은 경기 참관 다음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민정장관 수락을 논의하는 약속예정을 잡았다. 그 전에 여운형은 ‘옷을 갈아입겠다’고 차를 타고 집으로 갔다. 오후 1시, 서울 혜화동 로터리 근방에서 트럭 1대가 갑자기 들이닥쳐 여운형이 탄 자동차를 가로막았다. 이어 한지근(韓智根)외 다섯 명이 나타나 여운형이 탄 자동차로 달려가 2발의 총탄을 쏘았다. 2발은 여운형의 복부와 심장을 정확히 관통했고, 병원으로 호송 중에 절명하였다. 당시 여운형의 옆에 있던 고경흠은 “그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은 조국…조선…이었으며, 미소를 띤 얼굴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갑작스런 선생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1947년 8월3일 광화문 인민당사 앞에서 발인식이 거행되었다. 그의 영결식은 인민장(人民葬)으로 치러졌다. 영결식에는 약 60여 만 명의 추모인파가 몰렸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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