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조선이 독립하기 전에는 술·담배를 않겠다(2)
칼럼-조선이 독립하기 전에는 술·담배를 않겠다(2)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1.03.15 13:52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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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조선이 독립하기 전에는 술·담배를 않겠다(2)

1947년 8월3일 여운형의 장례식에는 광복 이후 최다 인파가 모였다. 민중들이 슬픔에 동참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흰 옷을 입어서 서울 시내가 하얗게 뒤덮였다. 동대문운동장에서 영결식이 치러졌다.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과 역도선수 김성집 등 체육인들이 관을 운구하였다. 시신은 포르말린으로 방부(防腐)처리되어 쇠로 만들어진 관에 안치되었다.

통일이 되는 날에 다시 장사를 지내기 위함이었다. 그가 죽자 미 군정장관 하지가 육각수은관을 미국에서 특별 주문해 가져왔다고 한다. 서울 우이동에 묘가 위치해 있다. 2005년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에 여운형 집 터 표석이 설치되었다. 2007년 항일 독립운동가단체 협의회로부터 신간회창립 80주년을 기념하는 민족공동체 상이 추서되었다.

양평군에서는 생가를 복원했다. 여운형의 죽음으로 좌우합작위원회는 구심점을 잃게 된다. 제2차 미소공동위는 중재자가 없어지자 극좌, 극우 양극단 세력의 갈등이 표출하였고, 끝내 미국-소련의 입장만 확인한 채 1947년 10월에 제2차 미소공동위는 완전히 결렬되어 미국이 한반도 문제를 UN으로 이관함으로써 좌우합작위원회는 1947년 12월에 공식 해체된다. 결국, ‘통일임시정부’수립을 위한 좌우합작운동은 좌절되어 실패로 끝났고 한반도는 ‘남한 내 단독정부 수립’안이 확정되기에 이르렀다.

암살 배후에 대하여는 우익계열에 의한 암살설·박헌영 계열에 의한 암살설·​김일성 계열에 의한 암살설이 있으나 암살 배후가 불분명한 가운데, 좌익세력에 암살되었다는 설이 우익진영에서 꾸준히 제기되었지만, 암살 사건 현장에서 경찰이 암살범의 도피를 방조한 점이나 범행 직후 우파 소행으로 보이는 암살 성공을 알리는 벽보가 서울 곳곳에 나붙은 정황 증거 등을 감안하면 우익진영에 암살되었다는 설이 더 유력하다.

1945년 10월10일부터 11월9일까지 ‘선구회(先毆會)’라는 단체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를 지목하는 설문조사 결과 33%가 여운형을 지목하였다. 그 뒤 다시 대통령에 적합한 인물을 설문조사했을 때는 1957명 중 78명이 여운형을 지목하였다. 한편 최고의 혁명가를 꼽는 설문에서는 978명 중 195표를 얻어 1위였다.

1946년 7월 ‘조선여론협회’가 서울에서 누가 초대 대통령에 적합한가를 조사한 설문결과에는 689표로 전체의 10.3%를 확보했다. 여운형 서거 후 1947년 7월22일, 우사 김규식은 군정청은 처음에 한민당 세력들로부터 ‘여운형은 친일파이며, 공산주의자’ 라는 소리를 듣고 여운형을 의심했으나, 나중에 그러한 오해가 풀리게 되어 여운형의 중도파 정치노선에 호감가게 되었다고 했다.

미 국무성 담화는 그는 권력을 추구하지 않고, 국민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중략) 그가 공산주의자라는 생각은 틀린 생각이다. 그는 최대한 공산주의를 이용했을 뿐이며, 그는 민중정치기구 결성을 도왔지만, 그는 결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확신한다. 그는 공산주의 이론을 신봉하지 않았고, 소련편이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한국 편이었다.

1947년 1월, 이승만 지지단체인 ‘한국애국부인회’가 서울 주요 시내거리에서 이승만과 여운형 두 사람에 대한 지지 모의투표를 실시했는데, 결과는 1000표(이승만) 대 900표(여운형)로 근소한 차이를 나타냈다. 사회주의 운동 이력으로 독립운동의 업적을 인정받지 못하다가, 2002년 7월 ‘몽양 여운형 선생 추모 사업회’가 조직되어, 여운형에 대한 재평가와 독립유공자 서훈을 추서하기 위한 운동을 하였다. 2005년 3월1일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으나 선생이 받은 건국훈장은 2급훈장이어서, 조선의 독립과 청년들을 위해서 헌신한 업적에 비해 너무 인색하다는 비평이 있어 ‘오랜 시간 동안 제대로 사상문제로 대접받지 못하던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재조명의 시작’이라는 평가에서 오늘날 남북한 모두 존경받는 지도자로 평가받기도 한다.

와세다 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인 강덕상 교수는 ‘독립운동의 중심은 김구도 아니고 이승만도 아니다. 해방 후 외세의 간여가 없었다면 여운형이 민족의 지도자가 됐을 것이다’라고 평가하였다. 국가 보훈처에서는 2008년 2월21일 최고 등급(1급)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다시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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