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청보리의 추억
진주성-청보리의 추억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1.04.13 13:38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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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위식/수필가ㆍ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 회원
윤위식/수필가ㆍ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 회원-청보리의 추억

청보리밭에 봄바람이 분다. 파란 물결로 일렁인다. 바람결에 머리를 빗고 맺힌 한도 풀고 설움도 씻는다. 동토의 기억들을 훌훌 털어내고 한가득 내려앉은 봄 햇살을 오롯이 품는다. 봄에 씨를 뿌려 가을에 거두는 것이 일반적인데 보리는 늦가을에 씨를 뿌려 이듬해 늦봄과 초여름의 어름에 거둔다. 별난 삶일까. 보편적이고 일반적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늦가을에 뿌린 씨앗은 이내 움터서 파랗게 싹을 내지만 무서리와 된서리도 맨몸으로 맞는다. 서릿발이 솟으면서 뿌리를 내린 땅이 들떠서 말라 죽기도 한다. 씨 뿌린 농부는 가꾸느라 서릿발에 솟은 땅을 자분자분 다져 밟는다. 공생공존을 위한 아픔인가. 동고동락을 위한 인내인가. 새파랗게 여린 잎이 밟혀야 한다. 인고의 삶이라지만 한 살이가 너무도 고달프다. 엄동설한 긴긴밤도 견뎌내야 살아남는다.

무슨 삶이 이다지도 험난한가. 발을 붙인 땅속이 솟구쳐 올라 피를 말리고 언제 녹을지도 모를 얼음장 같은 눈을 덮어 얼어붙게 하고 애써 뿌려 놓고 피멍이 들도록 밟아댄다. 얼고 짓밟혀야 살아남는 길이라니 이 무슨 기구한 운명인가 사나운 팔자인가. 억울해도 못 살고 분해서도 못사는데 살아남다니 놀랍다. 구차한 삶일까 집착하여 모질어진 생명력일까, 어찌 보면 참으로 아금받다.

온갖 초목이 새봄을 맞이하여 향기롭고 빛깔 고운 예쁜 꽃을 피워서 봉접을 불러 모아 희희낙락 즐기는데 박복함도 유분수지 어쩌다가 보리는 꽃은 고사하고 가시랭이만 돋쳤던가. 하지만 이는 희생의 숭고함이고 헌신의 거룩함이다. 가을에 거둬들인 벼가 이듬해 추수 때까지 곡간에 남아준다면 무슨 걱정이 있으련만 이른 봄, 보리가 패기도 전에 바닥이 나니까 무슨 수로 끼니를 잇는단 말인가.

고산준령이 험하다 해도 보릿고개만 하겠으며 섧다 섧다 하여도 배고픈 서러움만 하겠냐는 눈물의 고개가 아니던가. 대소쿠리를 옆에 끼고 밭두렁에 올라서 혹시나 알이 여물은 이삭이라도 따려고 보리밭 이랑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아낙은 앞산 뻐꾸기가 되어 원 없이 울고 싶다.

네 설움 내 설움 알기나 하는지 뻐꾹새 서럽게 울어 야속하게 길어진 한낮,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배곯아 허기진 사람들의 몫이니 산새 들새는 꿈도 꾸지 말라며 범접하지 못하게 보리는 까칠한 가시랭이로 날을 세운다. 꽃단장도 마다하고 분단장도 마다했다. 알알이 튼실하게 살찌우고 싶어 봄볕을 다부지게 붙잡는다. 예전에 불던 봄바람이 청보리밭에 넘실거린다. 오늘의 풍요로움에 청보리는 애달픈 과거사를 봄볕에 바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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