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조선말 1만명 의병대장 정한용
진주성-조선말 1만명 의병대장 정한용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1.04.21 16:00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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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조선말 1만명 의병대장 정한용

직제(直齋) 정한용(鄭漢鎔)장군은 무과 출신으로 1896년 진주 부민들이 추대한 의병대장이다. <함양항일투사록>, <독립운동사 의병편>등에 의하면 하동군 옥종 출신으로 진주성을 완전히 장악하고 의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김해를 거쳐 부산으로 진격했다.

노응규와 함께 각기 군왕 앞에 상소문을 올리게 되는데 <고종실록>에 그대로 실렸다. 의병진은 김해방문으로 진격하여 구포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해 괴멸시키고 1896년 4월11일 선암 나루터에서 전투하고 창원으로 퇴각했다가 김해평야에서 적군과 치열한 전투로 적군 4명을 사살했다. 12일 합천군 삼가에 의병진을 옮겨 주둔할 때 14일 밤 관군이 대군을 이끌고 일시에 맹공을 가했다.

진주성이 위험해 지자 의병을 해산할 수밖에 없었는데 정부에서 선유사를 보내 의병해산을 종용했기 때문이었다. 이 때 뒤 늦게 노응규 일행이 나타나 의병해산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군왕의 어명으로 의병을 해산한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정한용(1865~1935년) 의병장의 활약상은 황현의 <매천야록>, <고종실록>, <직재집> 추경화의 <진주항일운동사>481~483면에 상세하게 등재됐다.

<고종실록>제 36권 1907년 12월20일자에 상소문이 그대로 실렸다. “군부의 원수는 의리상 반드시 갚아야 하며 시역한 역적은 사람들이 모두 주벌할 수 있습니다. 부모의 체모는 훼손되어서는 안되고 선왕의 법은 무너뜨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에 감히 한 몸의 생사와 성패를 돌보지 않고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을 규합하여 의로운 기치를 들고서 골수에 사무친 원수를 복수할 것을 맹세 했습니다”

정한용 의병대장은 1902년 스승인 최익현 선생을 하동과 진주로 모셔 학문의 요결을 들었으며 1905년 충정공 민영환이 자결하자 천리 길을 달려가 제문을 바친 분이다.

제문 내용이 문집에 실렸는데(大節) 민중정공의 충정은 바다와 하늘에 빛나니 충일국 정신은 천추의 원한이 맺히고 많은 감읍이 배양되는 것과 같다. 최익현 선생이 의병을 일으키다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상경해 옥문 밖에서 문안했다. 1907년 최익현 선생이 대마도로 잡혀가 순국했고 시신이 부산으로 운구 되자 부산으로 달려가 수행하고 제문을 바쳤으며 일제에 대한 경계 말씀을 남기고 1935년 향리에서 별세했다.

직재 선생의 문집은 장손인 전 진주여중 교감 정준화 교감이 보관하다가 지금은 진주시 봉곡동에 사는 손부가 보관하고 경상대학교 도서관에서도 보관중 이다.

필자가 1998년 7월30일 각 지방신문 경남매일. 부산매일. 경남일보 등에 보도케 하고 포상신청서. 공적서. 평생 이력서 등을 작성해 후손들의 서명을 받아 제출했으나 심사위원 사이에 오해가 생겨 정부 포상이 성사되지 못했다.

그 당시 재판기록이 현존하므로 제대로 한다면 상당히 높은 등급의 훈장이 추서되어야 마땅한 일이다. 2021년에는 반드시 정부포상이 성사되기를 소원한다.

정한용 장군의 문집(文集)을 통해 면암 최익현 선생에 대한 제문과 충정공 민영환에 대한 제문을 보면 정한용 장군의 애국 충정을 바로 보고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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