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오리 배 하나 없는 쓸쓸한 남강
진주성-오리 배 하나 없는 쓸쓸한 남강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1.05.12 14:43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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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오리 배 하나 없는 쓸쓸한 남강

진양호 아래에서 진주대교와 상대동을 거쳐 하대동까지 살펴봐도 배 하나 없는 쓸쓸한 남강을 보니 눈물이 난다.

머물고 가는 관광지를 추구할 시기가 오겠지만 오리 배 한 척 없는 남강을 보니 외롭고 쓸쓸하고 한심하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일제 강점기인 1910년 전후에도 일반인들과 기생들. 악공들이 배를 띄워 장구치고 춤추고 노래했다는 기록과 보도를 자주 볼 수 있다.

1921년 3월30일 평양 대동강 도선장에 전등을 가설해 밤낮으로 왕래하고 노래하고 즐거워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낙동강변 밀양에서 도선할 때 무임 승선토록 했다는 기록도 있다.

2009년 전후에 남강변에 오리 배가 있어 전국에서 젊은 남녀들이 찾아와 데이트를 하였고 풍류를 즐겼다.

해양소년단 진주연맹에서 주관하여 배를 띄우고 음료수를 판매하였고 남강물을 보면서 음악 감상과 사랑을 나누는 장소로 애용되었다.

옛 기록에 보면 촉석루에서 풍류를 즐기고 시를 낭송하고 귀환 동포를 위한 위문 공연이 실시되었다는 것이다.

요즘에는 간단한 행사와 전시회도 허가받기가 까다롭다고 한다.

촉석루와 객사 사이에 연회가 빈발하였고 한상 차림, 술안주 문화가 널리 퍼졌고 북 평양. 남 진주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번창했었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 요리점, 요정, 조선 기생 2468명(진주 기생 250여명), 일본인 기생 2830명이 교방을 차려 각 종 음식점. 냉면 문화가 창대했다고 전해 온다.

전국 시인 묵객들이 찾아오고 ‘애수의 소야곡’, ‘남강의 추억’, ‘진주라 천리길’, ‘울어라 남강’ ‘진주 난봉가’ 등이 유행하고 진주 출신 6명의 작곡가 이재호, 정민섭, 김서정, 이봉조, 문호월, 손목인 등을 남강이 키웠다.

경기도 양주시에 가보면 정약용 선생을 기리는 뱃 다리를 건립해 관광객 수백만 명이 찾았다는데 진주도 정약용 선생과 관련되는 바가 있으니 배와 배를 연결하는 뱃 다리를 복원하면 관광의 도시. 낭만의 남강이 될 것은 자명한 일이다.

촉석루 아래에 가보면 강변 산책로가 끊어져 있는데 약 40m만 이어주고 연결하는 것과 동시에 의암 바위 위로 유리 다리를 건설하면 의암도 보호하고 관광객 수백만 명을 유치할 수 있으며 머물고 가는 관광 진주와 남강이 될 것이 분명하다.

역시 오리 모양의 오리 배도 복원해 젊은 청춘들이 즐기게 할 필요가 있고 배와 배를 연결한 옛적 뱃 다리를 건설하면 큰돈이 들지 않고 관광 진주. 관광 남강이 될 것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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