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비루함이 나를 더럽히지나 않을까 염려했다
칼럼-비루함이 나를 더럽히지나 않을까 염려했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1.05.17 14:58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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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칠암캠퍼스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칠암캠퍼스 토목공학과 겸임교수-비루함이 나를 더럽히지나 않을까 염려했다

나는 본디 성품이 간솔하고 오만해서 세상과 원만한 관계를 이루지 못하다가 늦게야 벼슬길에 나아갔다. 그러나 한사코 권세 있는 자들을 뒤쫓지 않았다. 또한 온 세상 사람들이 탐욕스럽고 더러웠으므로 같은 대열에 서는 것을 부끄러이 여겼다. 그때 대북의 당파가 아주 기세를 펴고 있었는데, 전조(銓曹, 이조)에 천거된 것이 세 번이었으나, 임시직인 가랑(假郎)을 제수 받았다. 그래서 머리를 굽히고 봉직했으나 마음속으로 울울하여 즐겁지가 않아 외직에 보해지기를 구하여 괴산으로 나갔다.

그러나 늦추고 조이는 나의 다스림을 토호(土豪)들이 싫어했고, 마침 언관(言官)들이 저들과 같은 당이라서 그들의 위세를 빌려 나를 모함했다. 그 후에 성균관 사성이 되었으나, 간악한 당의 괴수의 자식이 대사간이라, 내가 자신들과 다른 의견을 가진 점을 문제 삼아 알력을 일으켜 결국 배척을 당했다. 얼마 되지 않아 대동찰방(大同察訪)으로 나갔다. 그곳은 탐악한 관리가 연이어 거쳐 간 터라서 몹시 시들고 병들어 있었으므로, 조목조목 진술하여 위로 조정에 보고하여 병폐를 제거하고 피폐한 백성을 구제하려고 했다.

하지만 원수(元帥)가 대군을 이끌고 오랑캐의 굴혈로 향하면서 갑작스레 힐책하여 나를 욕보였으므로, 그길로 관직을 그만두고 돌아왔다. 돌아와서 나는 가만히 생각했다. ‘재주는 옛사람에게 미치지 못하면서도 뜻만은 옛 현인들을 흠모하고, 선비들 사이에 천리가 끊어지다시피 한 것을 분개하여, 그 비루함이 마치 나를 더럽히지나 않을까 염려했다. 벼슬 생각을 완전히 끊고 죽는 날까지 밭두둑에 숨어 지내야 하겠다’ 이렇게 해서 벼슬길에 나선 것이 겨우 10여 년이었고, 녹봉을 받은 날은 거의 없었다. 일찍이 우계(성혼) 선생의 문하에 나아가 공부할 때 선생께서는 명리를 위해서는 안 된다고 늘 경계했다. 나는 그 말씀을 평생 가슴속에 품고 잊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스스로 명(銘)을 쓰는 것은 자식과 손자로 하여금 빈말을 지어내어 후세에 허풍을 떨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위 내용은 태비(苔扉) 윤민헌(尹民獻, 1562~1628, 66세)이 죽기 전에 스스로 쓴 묘지명(墓誌銘)이다. 이선(李選)의 <지호집(芝湖集)>에 실려 전한다.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하생으로, 26세 때인 1588년(선조 21년)에 사마시의 진사과와 생원과에 모두 합격하고 47세 때인 1609년(광해군 원년)의 증광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정원에 들어가 권지부정자가 되었다. 50세 때인 1612년에 전라도사가 되고, 1613년에는 괴산군수로 나갔으나, 이듬해 탄핵을 받고 돌아왔다. 이어서 성균관 사성이 되었으나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채직되었다.

1617년에는 대동찰방에 제수되었으나, 얼마 안 있어 파직되었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亂)때에 왕을 호종한 공으로 통정대부(정3품)에 오르고,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공조참의에 이르렀다. 윤민헌은 사마시 양과(兩科)와 문과에 급제하고도 청요직에 오르지 못했다. 그가 말한 대로 권력자들의 뒤를 쫓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비들이 염치를 돌아보지 않게 된 상황을 개탄하고, 그들의 비루함이 나를 더럽히지나 않을까 염려했다고 했다. 마치 춘추시대 노나라의 대부 유하혜(柳下惠)가 그랬듯이, 남의 비루함이 자기를 더럽히지나 않을까 걱정한 것이다.

윤민헌도 현실과 타협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개결(介潔)했다. 그의 호 태비는 ‘이끼 낀 사립문’이라는 뜻이다. 남과의 왕래를 끊고 은둔하는 집을 상징한다. 윤민헌은 권력자들을 추종하지 않은 것을 가장 자부했다. 광해군 시절 대북파에게 부화하지 않았고, 인조반정 이후에는 공신들에게 뇌동하지 않았다. 윤민헌은 선비의 염치를 중시했다. <관자(管子)>에서는 예(禮)·의(義)·염(廉)·치(恥)가 국가를 지탱하게 하는 사유(四維)라고 했다. 염은 굽음 없이 정직한 염직과 사욕 없이 맑은 청렴을 뜻한다.

한편 치는 마음에 부끄러워하는 바가 있으면 귀가 빨갛게 되는 데서 부끄러워한다는 뜻을 나타내게 되었다. <논어>와 <맹자>는 ‘사람이 수치를 알지 못하면 결백하지 않게 되고 사회에 수치의 마음이 없어지면 관습을 위반하거나 도덕률을 뒤흔드는 일이 일어난다’고 했다. 또〈진심상(盡心上)〉에서는 ‘사람이 수치가 없으면 안 된다. 수치스러운 마음이 없음을 수치스럽게 여기면 수치스러운 행위가 없어진다. 수치는 사람에게 아주 중요하다. 교묘하게 임기응변하는 자는 수치스럽게 여길 줄을 모른다’라고 했다. 윤민헌이 부끄러움을 강조한 것은 선비들이 지켜야 할 정신 태도를 선명하게 드러내어 시대를 비판하는 뜻을 지녔다. 요즘 북한산 아래 구중궁궐에는 비루하고 수치를 모르는 자들이 많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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