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항일투사 김종범을 포상하라
진주성-항일투사 김종범을 포상하라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1.05.19 15:58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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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항일투사 김종범을 포상하라

김종범(金鍾範) 선생은 진주공립농업학교 제 1회 졸업생이며 호적이 창원과 진주 등 3곳이나 있는 특이한 인물이다.

1919년 일본 유학을 가고 1921년 4월 부산 애월회 간사가 되고 조선교육 개선회 창립에 동참하고 조선청년회 연합회 제 2차 정기대회에서 의장중 한 명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일간지에 ‘조선교육 문제에 관하여’ ‘교육조사위원회에 대한 오인의 희망’이란 제목으로 기고했다.

1921년 8월 부산 주택난 구제기성회 발기에 참여하고 부산시민대회 실행위원장으로 선출됐다.

부산 부두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할 때 동아일보 지국장으로 노동자의 입장에서 파업 투쟁을 보도했다.

1922년 7월 부산청년회 총무간사가 되고 부산 차가인조합의 결성에 동참하였다. 부산지역 활동의 중심이었다.

1922년 12월 일본 재류조선인 상황 조사회의의 일원이 되어 일본 대판노동동맹회를 창립할 때 임시 의장이 되었다.

1923년 1월 동경에서 사상단체인 북성회 결성에 앞장서고 북성회가 순회 강연회를 실시할 때 동참해 국내외에서 강연을 실시했다.

1924년 1월 경남노동자간친회를 조직케 하고 조선공산당 결집을 위해 13인회를 조직 활동을 했다.

남선노농동맹과 전라도 노농동맹에 참여하고 중앙상무집행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북성회 기관지에 글을 발표하기도 하고 출판사 연문사를 만들어 출판을 시행했다.

1925년 6월 화요파 중심의 조공결성을 막기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회담을 실시했다.

1926년 6월 한글로 된 정론을 발행하고 만주 길림성에 가서 정통단을 결성해 대표가 되었다.

1927년 7월 만주 봉천주재 일본 영사관에 체포되었으나 화장실을 통해 탈옥하는데 성공했다.

1928년 2월 장춘 주재 일본 영사관에 체포되었고 대련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이 언도되어 옥고를 치르는 등 수 차례 옥고를 치렀다.

1938년 5월 증등과정에서 한문교육을 폐지함은 반대한다는 의견서를 총독에게 발송했다.

1945년 9월 한국민주당 결성에 참여하고 잡지 <국민시보>를 발행하고 <해방전후의 조선진상>을 저술해 히트작이 되었다. 1972년 서울에서 별세했다. 서울 사는 후손들이 포상해 주기를 눈물로 호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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