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LH 본사 앞을 지나면서
진주성-LH 본사 앞을 지나면서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1.06.01 15:35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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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위식/수필가ㆍ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 회원
윤위식/수필가ㆍ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 회원-LH 본사 앞을 지나면서

출근 시각이 지난 뒤인데도 시내버스가 만석이고 네댓 사람은 손잡이를 잡고 섰다. 차량 속도 3050이 시행된 이후로 차의 흔들림이 훨씬 적어졌다. 가로수는 푸르러서 싱그러운데 승객들은 하얀 마스크가 입을 막아 풀이 죽어있다. 입놀림이 자연스럽지 않아 발음조차 어리바리하여 말하기가 싫어졌다. 자연히 눈이 앞선다. 승객들도 창밖에 눈을 댄다.

예전 같으면 지인끼리 주고받는 대화를 본의 아니게 엿듣기도 했는데 마스크가 그럴 일도 없게 해서 바깥만 본다. 요즘의 도로 가에는 현수막이 지정 게시대 말고도 가로수와 가로수로 연이어 걸려서 오색찬란하게 전시회를 한다. 문산IC 사거리와 충무공동 교차로도 현수막의 거리다. 차의 속도가 느려져서 웬만한 현수막은 건듯건듯 읽을 수 있다.

다음 정류장을 알리는 기계음 소리는 익숙해져 있는데 느닷없는 음성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귀를 쫑긋 세웠다. “에레이 빌어 묵을 늠들! 그새 변덕이라?” 의자를 붙잡고 선 할머니께로 승객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쓸개가 빠졌다 빠졌어!” 머리카락이 반백이신 할머니는 승객들의 시선과는 상관없이 톤을 높인다. 승객들이 얼른 본래의 자세로 돌아가 굳어버린다. “뭐시라? 엘에이치를 응원 한다꼬!?” 승객들은 누가 시킨 듯이 일제히 창밖을 내다보는데 ‘LH를 응원합니다’라고 내걸린 현수막은 이미 지나친 뒤다.

“즈거들은 가는 대마다 집사고? 젊은 아-들이 집을 못 구해서 결혼도 포기하는데 즈거들은 집 장사하고 땅장사해? 나라 망해 무라! 그걸 응원해?! 쓸개 빠진 늠들” 찬물을 끼얹은 듯 차 안에 냉기가 흐르고 승객들이 석고상같이 굳어진다. 중년 아저씨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서 할머니의 어깨를 두 손으로 살며시 잡아끌어 자기가 앉았던 자리에 앉히고 천장의 손잡이를 잡고 목이 아픈 척 고개를 좌우로 흔들다 만다.

침묵도 잠깐, 버스가 때맞추어 거대한 LH 건물 앞을 지나자 “에레이 나쁜 늠들” 아까와는 달리 말끝이 흐려져 푸념같이 들린다. 승객들 모두가 멍한 자세다. 할머니의 시선은 창밖에 고정되고 승객들은 아무도 할머니를 쳐다보지 않는다. 다음 정류장 안내 방송이 나오자 앞에 앉았던 앳된 청년이 할머니 앞을 지나면서 고개를 깊이 숙이고 내리는 문 앞에 선다.

모두가 청년을 바라본다. 출입문이 닫히며 바깥 소음이 차단되는데 할아버지 한 분이 ‘으-응’하고 앓는 소리를 낸다. 새로 오른 승객들이 앉고 서며 자리를 잡자 조금 전의 분위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오늘따라 김시민대교의 드높은 교각이 더 삐딱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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