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그해 현충일의 일기
진주성-그해 현충일의 일기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1.06.08 15:54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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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위식/수필가ㆍ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 회원
윤위식/수필가ㆍ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 회원-그해 현충일의 일기

어김없는 그날인데 해가 갈수록 추념식마저 소홀해지는 것 같아 야속해서 옮겨본다. 유월이 향 내음에 젖는다. 사이렌 소리가 가슴속을 후빈다. 조총 소리가 원한을 토한다. 진혼 나팔이 애간장을 녹인다. 한 폭 내려 걸린 태극기도 숙연하다. 조화가 피고 향불의 연기도 피어오른다. 서러운 사람이 앉았고 의분에 찬 사람이 앉았다.

못 잊어 하던 사람이 앉았던 맨 앞줄이 비었다. 아니 소복 차림의 여인들이 앉았던 그 줄이 없어졌다. 겹겹이 앉았던 하얀 줄이, 한 줄이 줄고 또 한 줄이 줄더니만 기어이 소복차림의 앞줄은 그렇게 사라졌다. 작년같이 향불은 오늘도 피건만 오지 않는 그 사람, 하얀 손수건 꼬깃꼬깃 적시며 해마다 주름진 골이 깊어지던 그 사람, 마디가 굵어진 손을 맞잡고 말없이 서로를 달래주던 할머니들이셨다.

쪽 찐 머리 백발이 되도록 한결같이 손수건 꼭 쥐고 앉았더니만 그 자리에 없다. 향불은 피건만 오지 않는 그 사람. 야윈 어깨를 들썩거리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던 그 사람. 조총 소리에도 놀라지 않는 것은 모진 삶이 귀를 막아서였고 향 내음이 가슴앓이던 것은 화약 냄새가 가로막아서였다.

하얀 모시 저고리가 젖는 것은 유월의 햇볕이 아니라 청춘을 불사른 신열이었고 오지랖을 적시는 것은 북받치는 서러움이었다. 베갯잇 적시던 밤은 기다림이었고 새벽의 몸부림은 꿈을 깨지 않으려는 간절함이었고 버겁기만 한 삶의 짓누름이었다. 세월이 하얗게 머리에 내려앉아도 마르지 않는 눈물은 영원히 함께하자는 질긴 끈이었다. 정화수 떠놓고 시린 손 비비기를 얼마나 하였으며 밤마다 이름 모를 골짜기를 얼마나 헤맸던가. 꼬깃꼬깃 손수건 거머쥐고 기어이 가셨단 말인가. 돌아오지 못할 세월의 강을 건너, 포연이 자욱한 골짜기를 찾아서 가시는 길일까.

백마고지로 향하는 길일까. 그토록 당부하고 떠나갔던 그 말 한마디를 가슴에 품고 평생을 못 잊어 하시더니, ‘낙동강은 잘 있다’라는 그 말 한마다 전하려고 그 먼 길을 가시는 길입니까. ‘우리는 전진 한다’며 앞으로 앞으로만 가신 임을 찾아 기어이 가시는 길입니까. 구월산 이름 모를 골짜기에 뉘어버린 젊음을 찾아 정녕 가시는 길입니까? 우리는 가슴이 아려서 보내지 못합니다. 우리는 맺힌 한을 풀지 못해 보내지 못합니다. 산자의 함성이 조국 강산을 울려 퍼지기 전에는 우리는 이대로는 보내지 못합니다. 그날이 오기까지는 그냥은 보내지 못합니다.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져 간 청춘이여! 따르고 따르는 산자의 영혼이여! 오늘도 가슴에 향을 사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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