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칠암캠퍼스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칠암캠퍼스 토목공학과 겸임교수-폭군 연산군의 장인을 때려죽인 전라부사눌재(訥齋) 박상(朴祥, 1474~1530·56세)은 광주 방하동(현 서구 서창동)에서 출생한 빛고을 광주인이다. 16세기 호남을 대표하는 사림(士林)이다. 눌재가 전라도 도사로 막 부임한 1506년(연산군12) 8월이다. 그는 부녀자를 겁탈하고 행패를 일삼던 나주의 천민 우부리(牛夫里)를 잡아다 관아(官衙)인 금성관에서 장살(杖殺)에 처했다. 우부리는 딸이 연산군의 총애를 받는 첩이라는 권세를 믿고 패악과 부정부패를 멈추지 않아 지역 원성이 자자하던 터였다. 하지만 왕의 장인을 치죄했으니 그 또한 중벌을 면치 못할 위기에 몰린다.
우부리 집에서 이러한 사실을 서울의 궁에 급히 알렸기 때문이다. 연산군은 화를 내며 박상에게 사약(賜藥)을 내린다. 왕명으로 의금부도사가 사약을 가지고 나주로 내려오고, 박상은 우부리의 죄상을 낱낱이 밝히고 대죄를 청하기 위해 상경한다. 장성 갈재를 넘어 입암산(笠岩山)밑 갈림길에 이르렀다. 난데없이 들 고양이 한 마리가 “야옹 야옹”거리며 바짓가랑이를 물어 채기에 이상히 여겨 오라는 대로 따라갔다. 의금부도사와 눌재의 길이 운명적으로 엇갈려 사약을 피하게 되었는데 곧바로 중종반정(1506년)이 일어나 위기를 모면한다. 아마도 선생의 곧음을 하늘이 도왔던 것 같다.
선생은 불의에 맞섰던 정치인이자 문장가였다. 1160여 수가 넘는 시를 남긴 위대한 시인으로서, 호남시단의 조종(祖宗)으로 칭송되는 인물이다. 일찍이 정조의 눌재 시에 대한 상찬은 이목을 끈다. ‘청아하며 고고하고 담박하여 저절로 한없는 맛이 있고 후인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나아가 당대 뛰어난 시인들의 장점을 다 갖춘 최고의 시인’이라 명명한다. 또한 정조께서는 <눌재집(訥齋集)>을 중간(重刊)한 뒤 인쇄해 올리도록 하교하며, ‘우리나라의 시 가운데에서는 오직 고(故) 교리 박은(朴誾)과 증 이조판서 박상(朴祥) 두 사람의 시가 있다는 것을 알 뿐이다’라고 하여 그를 박은(朴誾)과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언급했다.
선생은 가셨지만 선생이 남긴 묘지명이 교훈을 주기에 소개한다. ‘재주도 없고 덕도 없는 보통사람에 불과하고 살아 선 벼슬이 없고 죽어서는 명예가 없는 보통 넋에 불과하다 시름도 즐거움도 사라지고 헐뜯음도 칭송도 그친 지금 그저 흙덩이에 불과 하구나(旣無才又無德 人而已 生無爵 死無名 魂而已 憂樂空 毁譽息 土而已)’ 칭송의 말을 길게 늘어놓는 묘지명과는 사뭇 다르다. 세상에 머물 때는 재주도 덕도 없는 보통 사람일 뿐이었고, 살아서는 벼슬, 죽어서는 명예가 없으니 하등 특별할 것 없는 넋에 불과하다고 자신을 평가했다. 자조적인 명예와 생사를 초월한 모습까지 보여주고 있다. 2017년 1월 6일 담양의 한국가사문학관에서‘문간공눌재박상선생영정봉안식’이 열렸다. 그동안 문중이 보관하고 있던 영정을 일반에 공개한 것이다. 불의를 참지 못하는 그의 기질이 ‘의향 남도’의 맥으로 이어지지 않았을까한다. 선생을 기리는 책이 출판되었다. <눌재 박상(호남 의리사상의 실천가)>·김동수 저·동인출판문화원·(2016년 10월17일)
공군 여중사가 상관들의 성폭행에 시달리다 견디지 못하고 목숨을 끊고 말았다. 눌재 선생이 다시 살아나 이놈들을 장살로 다스려 주었으면 한다. 군대 판이 개판보다도 못한 늑대들 판이 되어 버렸다. 공군참모총장이란 자는 이런 사건을 보고 받고도 묵살해 버렸다고 하는데 왜 전역으로 끝나고 말아야 하는가? 중사보다 낮은 하사로 강등 전역시킨 후 구중궁궐에 내시(內侍)로 보내라. 이런 조치를 해도 성난 민심을 어떻게 달래겠으며 유명을 달리한 여중사와 그 가족들에게 무슨 위로가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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