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민칼럼-고향이야기(3)
도민칼럼-고향이야기(3)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1.09.30 17:51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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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선/시조시인·작가
강병선/시조시인·작가-고향이야기(3)

발산마을 뒤 구랑 골 봉우리에 벼락 바위가 자리 잡은 정상에 올라서면 남쪽으론 필자의 아버지가 평생을 지게와 괭이로 평수를 늘려나가던 천수답이 있는 고사 골이며 동쪽으로 계속 올라가면 백운산으로 연결되는 곳이다.

해가 넘어가는 쪽에는 쳐다만 봐도 장엄한 봉두산이 펼쳐지는데 순천시 황전면과 곡성군 죽곡면을 경계하는 해발 753M 봉두산이다. 여순사건의 악몽은 한국전쟁까지 이어져 50여 명에 가까운 경찰이 북한군과 싸우다 죽어야 했던 유명한 천년 고찰 태안사가 있다.

신라 경덕왕 때, 세워진 절로 알려진 혜철 선사의 부도인 적인 선사 조륜 청정 탑(보물 제273호), 광자 대사 윤다(允多)의 부도인 광자 대사 탑(보물 제274호), 광자 대시비(보물 제275호), 승무를 출 때 사용하던 태안사대바라(보물 제956호), 태안사동종(보물 1349호), 등 이밖에도 태안사에는 국가에서 지정한 보물과 문화재로 지정해 보호하는 것들이 즐비하다.

여순사건과 6, 25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아름드리 소나무들을 당국에선 지역 주민들을 동원해 무차별 베어 눕혔다. 이유는 여순사건과 6.25 한국전쟁으로 북한군이 미처 후퇴하지 못하고 패잔병으로 남아 빨치산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숨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전쟁이 끝나고 10, 20년이 지나면서는 그때 베어 눕혀놓은 소나무들이 썩어 고주바기가 되고 관솔로 남은 것들이 지천이었다. 마을 인근엔 땔나무가 귀했으므로 발산마을 사람들은 태안사 뒷산에까지는 하루 종일 걸리는 먼 길을 멀다 하지 않았었다. 도시락을 싸 짊어지고 어두운 새벽에 나서야 봉두산 태안사가 있는 뒷산까지 올라가 고주바기 관솔 나무를 지게에 지고 올 수 있었다. 거기에 필자도 빠지지 않고 다녔었다.

그런가 하면 고사리를 채취하러 갔다가 봉두산 정상에서 발산마을을 쳐다보면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것 같아 감격하지 않을 수 없다. 마을을 빙 둘러 병풍처럼 야트막한 산들이 산수화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여름에는 동네 앞으로 대마(大麻)밭이 숲을 이루고, 가을에는 무와 배추가 자라는 마을에 감나무녹음이 우거진 아름다운 마을이다.

이처럼 한 폭의 산수화를 자세하게 가까이서 보기 위해서는 마을 뒷산에 땔나무를 하러 올라가면 더 자세하게 선명하게 볼 수 있다. 뒷산 벼락 바위에서 내려다보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의 마당이 감나무 사이로 보였다. 앞쪽도 산 뒤쪽도 산이요, 양옆에도 산으로 병풍처럼 바람막이를 해주면 잘 익은 감이 나무마다 발갛게 달려 있고 마당엔 빨간 고추가 덕석에 널려 있었다.
가을에 올라갔을 때는 단풍이 발갛게 물든 감나무 잎들과 빨간 감들이 익어가며 지붕에는 박넝쿨 잎새로 보름달처럼 둥근 알궁둥이를 드러내놓고 익어가는 박들이 숨바꼭질하는 마을 모습은 유명한 화가가 그린 한 폭의 한국화였다.

동네 앞으론 섬진강을 찾아 강물이 흘러간다. 황금들판엔 벼들이 익어가는 신작로를 달려가는 자동차가 흙먼지를 일으키면 때마침 기차가 검은 연기를 뿜어내 하늘에 수놓고 지나갔다.

이런 천혜의 고향마을을 두고 다른 데로 떠나 살지 못하는 발산마을 사람들이었다. 일찍이 일제강점기를 견디어 냈고 여순사건을 겪으면서 곧바로 6, 25 한국전쟁을 겪고 살면서도 서로 고성은 오고 갔을 일이 있을지언정 어느 한 사람 마을에서 왕따 당하는 일은 없었다.

당시 마을에는 면사무소와 지서에 근무하는 두 사람을 14연대 좌익군이 죽였었지만, 일반인은 죽이지 않았었다. 그러나 한청이라고도 일컫는 대한청년단과 경찰에 의해 죽은 주민은 너무 많았었다. 그러나 서로의 이해관계로 인한 관청에 고자질할 줄 모르고 오순도순 살았었다. 법에 송사를 의뢰하는 일도 없었으니 바로 이런 이유로 마을 사람들이 다른 데로 떠나 살지 못하는 이유였었나보다.

마을 앞 강 건너에 별로 넓지 않게 형성된 들판 이름이 건(乾)들이다. 이런 건들 논 한 평 없이 남의 집 곁방살이를 하면서도 고향을 등지지 않았었다.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며 아내와 어린 자식을 먹여 살리면서도 객지로 나가지 않고 가난하게 살다가 여순사건이란 운명의 장난질에 난데없는 벼락을 맞았었던 사람도 있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의 진실을 밝혀주기 위해 얼마 전에 우여곡절 끝에 여순사건 특별법이 국회에 통과되었다. 억울함을 당했던 사람들이 이른 시일 안에 진실이 밝혀져 제주도 사람들처럼 명예 회복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고향마을 사람들은 태안사 뒷산에까지 도시락을 싸 짊어지고 고사리를 채취하러 갔다가 아름다운 마을을 쳐다보고 감탄한 나머지 대를 이어 오래도록 눌러 살고 있었는지 모르는 일이다.

네 번째 고향이야기가 다음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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