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사람들 이야기-장면4
아침을 열며-사람들 이야기-장면4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1.11.04 17:45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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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명예교수·철학자
이수정/창원대 명예교수·철학자-사람들 이야기-장면4

ED의 꿈을 꿨다. ‘ED가 돌아왔단다’라고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신기하단 듯 담담하게 수다를 떠는 꿈이었다. 나는 생각이 많은 탓인지 꿈을 엄청 많이 꾸는 편이다. 대부분 아무 의미도 없는 개꿈이다. 평생 그랬다. 그 꿈도 그랬다. 왜 그런 꿈을 꿨는지 도저히 해석 불가능이다.

나는 ED와 대면을 한 적도 없고 대화를 나눈 적도 없다. 하지만 그녀는 왠지 내 기억 속에 강한 인상으로 남아 있다. 어쩌면 ‘그녀는 예뻤다’ 뭐 그런 것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게 1950년대 말인지 60년대 초였는지는 이미 어슴푸레하다. 나이를 추산해보면 아마도 50년대 말이었던 것 같다. “누가 S아지매네 집 앞에 간난 아아(아이)를 버리고 갔단다. 아지매가 과분 줄 미리 알고 그랬는갑다. 아지매가 가를(그 아이를) 거둬 키우기로 했단다” 엄마가 그런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하던 기억이 남아 있다. 그게 ED였다.

6.25전쟁 직후인 당시로서는 드문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게 엄마를 비롯한 동네 아줌마들의 화제가 된 것은 그 S아지매가 작은 중국집을 경영하던 ‘화교’였고 그 아이는 어쨌든 한국 아이였기 때문이다. ‘한국 아아가 중국 아아가 됐네~’ 그렇게 그녀는 입양되어 법적으로 화교가 되었다.

오다가다 마주친 그 아이는 예쁘게 자라났고 중국 음식을 먹어 그런지 어딘가 중국인 같은 이국적 분위기를 풍겼다. 그 근처의 또 다른 중국집 아들 NG가 내 동갑내기 친구였기에 그를 통해 ED가 화교학교의 최고 우등생이라는 이야기도 전해 들었다. 한자가 가득하던 NG의 교과서에 어렴풋이 ED의 얼굴이 겹쳐졌다. 한국인으로 태어나 알 수 없는 사연으로 중국집 앞에 버려졌다가 화교가 된 예쁘고 똑똑하고 착한 아이, 그게 ED였다.

그 집은 넉넉지 못했지만 그녀는 S아지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티 없이 자라났고 역시 근처에 있던 커다란 중국집 SJ루의 할배가 상처를 하고 몇 년 뒤 S아지매와 재혼을 하게 되어 집안은 갑자기 부자가 되었다. 길거리에서 가끔 보는 그녀에게도 어딘가 부티가 느껴졌다.

나는 중학교 때 서울로 진학하는 바람에 일찍이 고향을 떠나 ED도 기억에서 멀어졌다. 대학생이 된 후 엄마를 통해 오랜만에 그녀의 소식을 들었다. 내 친구 NG의 뒤를 이어 ED도 대만으로 진학을 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대만 최고의 T대학이라고 했다. 전공은 듣지 못했다. 그 이후 나는 그녀를 본 적이 없고 소식도 들은 바가 없다. 대만으로 떠난 NG와도 소식이 끊어져버렸기 때문이다.

대학을 졸업한 후 나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거기엔 전 세계 오대양 육대주의 유학생이 다 있었고 대만 출신 유학생들도 많았다. (대만은 일본에 대해 특별히 우호적인 감정을 갖고 있다.) 자유세계라는 공통된 이념 때문인지 그들과는 특별히 친하게 지냈다. 그런데 1992년 한중이 수교하고 대만과의 외교관계가 단절되었다. 그때, 나는 도쿄에서 친하게 지냈던 RC이나 CG에게 엄청 미안한 느낌이었지만, 왠지 대만에서 인생을 살고 있을 ED와 NG의 얼굴이 미안함과 함께 먼저 떠올랐다. 그들은 고향인 한국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마음이 쓰였다. 묘했다. 기숙사에서 사귀게 된 대륙 사천 출신의 SC내외와는 그 기쁨을 함께 나누기도 했으니까. 개인의 인생과 국가의 정세변동이 묘하게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교수가 된 후 동료들과 단체로 대만여행을 하는 기회가 있었다. 일정에 따라 타이베이에서 기차를 타고 화롄으로 이동했다. 떠들썩한 출발 전의 풍경 속에서 나는 비슷한 또래의 한 대단한 미인을 목격했다. 응? 혹시 ED? 좀 놀랐고 살짝 가슴이 뛰었다. 그러나 세상에 그런 영화 같은 장면은 흔하지 않다. 생각해보니 내 기억 속에는 이미 그녀의 얼굴조차도 지워지고 없다. 그 인상만이 희미하게 남아있을 뿐. 나는 묘한 감상에 젖어들었다. 차중의 그녀 옆에는 남편으로 보이는 신사가 그녀의 짐을 선반에 얹어주고 있었다.

나는 훤칠하게 잘생긴 그가 어쩌면 어릴 적 내 친구 NG일지도 모르겠다는 상상을 해봤다. 대판 싸우고 그 아버지에게 불려가 혼날 줄 알았는데 뜻밖에 짜장면을 해주시며 사이좋게 지내라고 해서 정말 사이좋은 친구가 되었던 그 NG. 나는 그 행복해 보이는 대만 부부를 보면서 따라서 잠시 행복했다. 지금도 대만 어디에선가 ED는 실제로 잘 살고 있을 것이다. 중화민국의 국민으로서. 어쩌면 손주가 한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가슴 속에 자기를 버린 고향 한국이 어떤 이미지로 남아 있을지 가끔씩 좀 궁금해지기도 한다. 나는 그녀가 버려진 상처를 모두 지우고 행복한 노년을 보내고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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