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사람들 이야기-장면8
아침을 열며-사람들 이야기-장면8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1.12.14 17:32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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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명예교수·철학자
이수정/창원대 명예교수·철학자-사람들 이야기-장면8

살다가 그런 경우가 많지는 않다. 참 희한한 경험을 했다. 베이징에서 지낼 때다.

어떤 단체에서 내가 낸 책을 대량 구매해 회원 전원에게 선물로 돌렸다. 이런 영광이 없고 이런 고마울 데가 없다. 교민 행사의 일환으로 그걸 돌렸는데, 뜻밖에 받은 분들이 사인을 해달라고 우르르 찾아와서 난데없는 사인회까지 하게 되었다. 평소에는 내 책을 남에게 줄 때 사인하는 걸 싫어하는 주의라 대개는 완곡히 사양하는데 이번엔 그 성의가 너무 고마워 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중 한분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초대’를 제의했다. 시내에서 일본식 요리점을 운영하는데 내 강연을 듣고 감명을 받았기에 나를 꼭 자기 가게에 모시고 자기 요리를 대접하고 싶다는 것이다. 역시 그 성의가 너무 고마워 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혼자는 어색할 수도 있으니”하며 그 분의 지인들도 가세해 일행 5명과 함께 약속한 날 약속한 시간에 그 가게를 방문했다.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특별한 방문이었다. 뜻밖에도 거긴 천안문 바로 근처의 특급지였다. 가게의 수준도 공산당 간부가 드나든다는 특급이었다. 거의 2시간에 걸쳐 최고수준의 일본 요리를 풀코스로 대접받았다. 감동적인 맛이었다. 밥이며 회며 튀김이며 부침개며 거의 예술적 수준이었다. 그런데 감동은 그 요리만이 아니었다. 함께 그 요리를 음미하며 사장님은 자신의 살아온 내력을 들려주셨다. 그게 완전히 한 편의 드라마고 인생론이었다. 이런 건 요약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어쩔 수 없이 요점만 추려보자면 대략 이렇다.

HDY 사장님은 원래 상사맨이었다. 그것도 한국을 대표하는 한 대기업의 잘나가는 부장으로 북경지사에 부임했다. 수년간 근무하며 큰 성과를 올렸다. 회사를 위해 수훈을 세운 셈이다. 이윽고 임원으로 승진도 했다. 그런데 예정된 해외근무 기간이 끝나고 귀국이 다가왔을 때, 지사장이 아주 뜻밖의 제안을 해왔다. 귀국해도 장래가 좀 불투명한데 혹시 북경에 남아 사업을 할 생각이 없느냐는 것이다. 한다면 회사가 전폭 지원하겠다고도 했다. 소위 IMF사태로 구조조정이 한창일 때였다. 그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고 결국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무슨’ 사업을 할 것이냐였다. 숙고한 끝에 그는 평소에 관심이 있던 ‘외식업’을 지목했다. IT에서 요리로, 인생대전환이었다. 국내에서 이런저런 구조조정 이야기가 들려왔기에 다행히 가족들을 설득하는 것도 큰 문제는 없었다. 회사의 지원금과 퇴직금을 보태 천안문 바로 근처 북경 중심지(서울로 치면 종로1가 같은 곳)에 큰 규모의 일본요리점을 열었다. 장소도 그렇고 당시로서는 한식보다 일식이 사업으로서는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몇 달이 지났다. 다행히 사업은 순조로웠다. 입소문을 타고 손님과 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렇게 잘 나갈 때 꼭 마가 끼는 법이다. 자신감이 붙은 그는 최고수준을 염두에 두고 미슐랭에서 인정받은 일본인 셰프를 고용했다. 본격적으로 승부를 걸어볼 심산이었다. 이번에도 입소문을 타고 손님이 늘어났고 수입도 덩달아 늘어났다. 그는 쾌재를 불렀다. 그런데 웬걸 몇 달 후 재무상태를 보니 구멍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윽고 적자로 넘어가더니 부채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다. 그는 가게를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완전히 망해버린 것이다. 참담했다. 원인은 그 셰프에게 속은 것이었다. 엄청난 돈이 새나가 그의 뒷주머니로 들어갔다. 중국법도 잘 모르고 그의 감독불찰이라 처벌도 불가능했다. 그는 인생의 무게를, 특히 그 쓴맛을 제대로 느꼈다.

그는 약간 남은 돈으로 술에 절어 세월을 보냈다. 배신으로 인한 극도의 인간혐오로 모든 대인관계를 단절했다. 극단적 선택까지도 생각했다. 그러나 나 하나를 믿고 낯설고 물선 외국까지 따라와 묵묵히 뒷바라지해준 아내와 착실하게 학교생활을 잘해준 아이들의 잠든 얼굴을 보니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져내렸다. 그는 그 눈물을 혼자서 다 삼키고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 살아야겠다, 일어나야겠다고 그는 결심했다.

거액의 빚을 내서 그는 같은 자리에 같은 요리점을 다시 오픈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내용이 달랐다. 맡기지 않고 모든 것을 본인이 직접 챙겼다. 굴지의 대기업 임원이었던 그가 직접 시장을 보고 쌀을 씻고 채소를 다듬고 간을 맞추고. 과거는 완전히 지워버리고 그는 요리의 ‘질’만을 생각했다. 생선의 색깔이 달라졌고 익은 밥의 냄새가 달라졌다. 튀김의 식감도 달라졌다. 손님들의 칭찬이 돌아왔다. 그는 관심을 보이는 손님들에게 일일이 무릎 꿇고 앉아 그 설명을 해드렸다. 이게 왜 먹을만한지 납득을 시켰다. 가격을 올려도 손님들의 발길은 줄지 않았다. 해를 거듭하면서 그는 빚을 완전히 청산했고 돈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자만하지 않았다. 잘 될수록 더욱 조심하고 자신을 낮추었다. 가게도 가정도 완전히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면서 조금씩 다시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고 그 중 한 사람의 권유로 우연히 발걸음한 모임에서 나의 강연을 들었고 나의 책을 읽게 되었다는 것이다. ‘질적인 고급국가’를 지향하자는 나의 철학에 100% 공감했다는 것이다. 그 기묘한 시점도 그렇고 ‘인연’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나를 비롯한 여섯 명의 일행은 그의 요리가 보여주는 ‘수준’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토록 대단한 점심을 먹었음에도 그는 이대로 헤어지기 아쉽다며 이왕 오셨으니 저녁까지 드시고 가시라고 강하게 권했다. 그 분위기가 너무 좋았기에 우리는 무엇에 홀린 듯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저녁이 준비되는 동안 그는 우리를 넓은 홀로 안내했다. 잠시 주춤거리던 그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한 가지 자랑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망한 이후에 모든 낭비와 사치는 철저히 단절했습니다만, 인생이란 게 그게 다는 아니잖습니까. 좋아하는 취미가 하나 정도는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요? 그래서 딱 하나는 남기기로 했습니다. 저에게는 그게 오디오였습니다. 다시 돈을 벌게 되면서 딱 하나 돈을 아끼지 않고 오디오를 하나 장만했습니다. 정말 자랑할 만합니다. 한 번 들어보시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는데 안 들을 도리가 없다. 거대한 크기의 스피커가 눈을 압도했다. 전원을 넣고 선곡을 하고 재생버튼을 눌렀다. 그 소리가 우리 모두의 귀를 단숨에 장악했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소리였다. 분명히 기계건만 좀 과장하면 콘서트홀 현장에서 직접 듣는 생음악보다 더 고운 소리였다. 인간의 기술 수준에 탄복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내 1년치 연봉을 훨씬 능가하는 그 가격도 납득이 되었다. 그렇게 두어 시간 우리 일행은 음악을 감상했다. 클래식은 물론 팝송, 포크송, 영화음악, 중국고전음악, 심지어 뽕짝까지. 그 오디오는 모든 장르의 음악을 완벽히 소화해냈다. 감동이 있었다. 그러나 가장 큰 감동은 그 요리도 오디오도 아닌 그 사장님 본인이었다. 인생의 바닥에서 다시 일어난 그에게는 어떤 특유의 빛이 났다. 하나의 살아있는 귀감이었다.

우리 일행은 점심과는 또 다른 종류와 차원의 저녁을 대접받고 그 가게를 나왔다. 뭔가 한편의 명화를 감상하고 영화관을 나서는 듯한, 혹은 박물관이나 미술관이나 콘서트홀을 나서는 그런 기분이었다.

인생을 사는 우리는 누구나가 난관을 경험한다. 그러나 그 난관을 대하는 태도는 사람마다 다 다르다. 많은 사람들은 좌절하거나 원망을 하거나 혹은 증오를 한다. 그런 것이 과연 답이 될까? 사장님은 그 자신의 현재 모습으로서 우리에게 그 답을 말해주고 있었다.

내가 거기서 다른 무엇도 아닌 ‘존경’이라는 단어를 떠올린 것은 그저 우연이나 과장이었을까? 그런 모습은 결코 쉽게 구경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도 아마 그 사장님은 정성을 다해 힘을 조절하면서 쌀을 씻고 있을 것이다. ‘가장 맛있는 밥’을 짓기 위해. 아니 어쩌면 최선의 자기와 손님의 최선의 한때를 위해. 인생의 행복은 결국 맛있는 밥 한 끼에서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가르쳐준 HY사장님께 나는 깊이 감사하고 있다. 진정한 감명을 준 것은 내가 아니라 청중석에서 어설픈 나의 강연에 감명을 느껴주신 바로 그 사장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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