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사랑의 진화
아침을 열며-사랑의 진화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1.12.20 17:36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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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환/국학강사
김진환/국학강사-사랑의 진화

진화와 창조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간단하다. 진화가 갑자기 일어나는 것이 창조이고 창조가 천천히 일어나는 것이 진화이다. 그것 가지고 지금도 갑론을박이 벌어지는데 우스운 일이다. 사랑도 여러 가지이고 방법도 다 다르다. 사랑의 크기는 측정하기 힘들지만 사랑은 종종 다양한 수준으로 묘사된다. 친구 간의 사랑, 동료 간의 사랑, 로맨틱한 사랑, 부모와 자식 간에, 스승과 제자 간에, 친구 간에, 형제간의 사랑 등 우리는 대부분이 조건적인 사랑을 경험한다. 그것은 에고의 욕망과 집착을 바탕으로 하므로 보통의 인간관계에서 흔히 경험할 수 있는 사랑의 표현이다.

서로 주고받는 일종의 대가에 대한 보상의 차원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조건적인 사랑은 인간관계에서 경험하기 힘든 큰 어려움과 고통의 요인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어려움을 잘 넘어서면 좋은 사람이라는 평을 듣고 사회생활도 원만해지지만 그렇게 잘 안 되면 반목하고 불신하다 관계가 깨어지게 된다.

이럴 때에 자주 등장하는 말이 바로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고 한다. 마냥 좋을 줄만 알고 자기희생이나 책임은 뒷전에 둔 이기적인 사람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얼마나 그런 이가 많으면 노래가 되어 흐르고 있을까. 조건 없는 사랑을 하면 적어도 눈물은 흐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꺼이 제공하고 던져준 사랑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마다 생각이 다 다르므로 스스로 그릇을 키우는 수밖에 없다. 그 그릇을 자꾸 키우다 보면 조건 없는 사랑을 체험한다. 사람과 대상에 대한 더 큰 포용력으로 다져진 측은지심으로 내면이 뭉쳐진 속이 거대한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이른바 도인이 되는 것이다.

개인의식의 성장에 따라 사랑의 진화단계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가 있다. 첫째는 부모에 대한 사랑이며 효이다. 둘째는 국가나 민족, 단체에 대한 사랑이며 충이다. 셋째는 인류와 우주에 대한 사랑이며 그것이 바로 도인의 사랑이다. 개인에서 단체로 단체에서 우주로 사랑하는 대상의 크기가 점점 커짐에 따라 의식의 크기와 질도 변하며 확장된다. 그래서 이것을 사랑의 진화라고 한다. 이 셋은 시작이며 끝이다.

효를 행하지 않는 사람이 충을 행할 수 없고 충을 모르는 사람이 도의 곁으로 갈 수가 없다. 시대 탓도 많이 하지만 효가 서서히 무너지고 있는 지금을 나는 몹시 우려한다. 부모는 하늘과 같아서 효는 백행의 근본이라고 하였는데 부모님을 함부로 하는 사건들이 일어나고 부모님을 무시하는 행동들이 자주 일어나기 때문이다. 서양의 유명철학자들도 우리의 효 정신을 아주 높이 평가하였는데 이대로는 정말 곤란해진다. 정신을 차려야겠다. 충은 효의 두께와 질이 향상된 상태이다. 나라와 민족이 없으면 어디서 무엇으로 부모님을 봉양할 것인가.

그런데 때론 효와 충이 상충하는 때도 있다. 과거 발해를 건국하였던 대조영의 아버지인 대중상이 동료인 이해고의 아버지와 갈등을 일으킨다. 이해고의 아버지도 고구려의 장수이고 대중상도 고구려의 장수였으나 이해고의 아버지는 부모님에 대한 효심 때문에 나라를 등지고 대중상과도 결별하며 이것은 나중에 당나라의 이해고와 대조영의 기나긴 혈투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다. 충은 효로써 그 에너지를 쌓아 성장하지만, 효는 절대로 충을 넘어서면 안 된다는 것을 역사는 준엄하게 가르치고 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척살하고 여순감옥에서 옥중생활 할 때 일제가 살려주지는 않을 것을 진작 알고 나라를 위해 기꺼이 순명할 것을 다짐했으나 가슴 한쪽에는 어머님인 조마리아 여사가 이를 가로막고 계셨다. 내가 순명하는 것은 나라를 위한 길이며 당당하나 자식이 먼저 부모님보다 앞서 하늘로 간다는 것이 너무도 불효이었다. 하지만 조마리아 여사는 안중근 의사에게 밝고 맑은 수의를 지어 보내시면서 옥중서신과 함께 아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으셨다. “아들아 네가 나보다 먼저 죽는 것이 불효라고 여기지 말라. 너는 대한 남아의 기개를 온 세상에 떨쳤으니 무엇이 부끄럽고 아쉬운 일이냐. 잔혹한 일제가 너를 살려둘 리도 없다. 그러니 당당히 그길로 가거라” 하시면서 용기를 주셨다. 삭풍 한설이 몰아치는 지금, 머나먼 만주 등지에서 나라를 잃고 기약 없는 조국의 독립과 광복을 향해 매진하셨던 분이 한두 분이 아니셨다. 그분들의 효와 충의 갈등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나라를 잃고 부모님을 멀리하고 마음대로 모실 수 없는 일이 우리 땅에서 다시는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정치인들이 입신하고 뜻을 세운 뒤에 현충원 등지를 찾아 호국영령과 순국선열들께 고개를 숙이긴 하나 현충원 안에서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고자 다짐하나 밖을 나서면 자기 당의 이익이나 당략에 빠져 서로 싸우기 일쑤다. 현충원 안에서 싸우겠다는 마음은 먹지 않을 텐데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착각에 빠진 사람도 있고 자기 분수도 모르고 날뛰는 사람도 있다. 나라에 돈이 없는 것이 아니라 도적이 많다는 말처럼 나라에 사람은 많으나 쓸만한 인재가 없다는 말이 실감 나는 시기이다. 어쨌든 이 나라는 서민이 지켜온 반만년의 나라이다. 눈을 부릅뜨고 이 나라를 책임질 사람을 가리고 가려야 할 때이다. 준엄한 선택에 다른 책임은 우리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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