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사람들 이야기-장면9
아침을 열며-사람들 이야기-장면9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1.12.28 17:19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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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명예교수·철학자
이수정/창원대 명예교수·철학자-사람들 이야기-장면9

우연히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것은 어쩌면 우리네 인생의 큰 재미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녀 HJ를 만난 것도 그런 우연이었다. 장소는 늘 가던 직장 구내식당. 무슨 행사가 있었는지 그날따라 사람이 많아 제법 붐비고 있었다. 빈 테이블이 없어 할 수 없이 양해를 구하고는 다른 사람들과 합석을 하게 되었다.

식사를 하며 어색함을 해소하기 위해 가벼운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은 자기네 일행끼리 계속 수다를 떨었다. 그런데 그 중 한 분의 말씨가 특이했다. 평소에도 언어에 특별한 관심이 있던 나는 곧바로 그게 이북사투리임을 알아차렸다. 말을 걸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말로만 듣던 소위 ‘탈북민’이었다. 탈북민의 국내정착을 ‘미리 온 작은 통일’이라 여기며 반기던 나였기에 좀 과할 정도로 그녀에게 ‘환영한다’는 인사와 격려의 말을 건네줬다. 그녀도 감사와 호의를 표시했다. 함북 혜산 출신이라고 했다. 3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꽤 미인이었다. 남남북녀라는 말이 떠올랐다. 모 연구소의 초청으로 강연차 내교했다고 했다. 뭔가 되게 신기했다. 내 바로 옆에 함경도 사람이 앉아 있다니! 그 사람과 함께 밥을 먹고 있다니! 어떤 감동조차 없지 않았다. 그 후 식당에서 몇 차례 더 마주쳤고 대화도 더 오고갔다. 모TV 프로에서 듣던 소위 탈북스토리를 그녀로부터 직접 들었다.

모두의 삶이 어려운 북조선 함북. 그녀는 그래도 아버지가 전직 군관이었고 억척같은 엄마가 장마당에서 장사를 잘 한 덕분에 상대적으로 좀 윤택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학창시절의 나름 아름다운 추억도 많다고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랫동네 알판’ 등에 대한 집중단속에 걸려 엄마는 로동교화소로 보내지고 집안에 위기가 닥쳐왔다. 아직 앳된 처녀였지만 장녀였던 그녀는 몸져누운 아버지 대신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조중 국경지대의 이점(?)을 살려 그녀는 밀수에 뛰어들었다. 그게 그렇게 돈이 되는 줄은 실제로 해보고서 비로소 실감을 했다고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집안도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고 그 돈으로 엄마도 빼내올 수가 있었다. 보위부에도 뇌물이 통하는 ‘구멍’은 있다고 그녀는 마치 비밀 누설을 하는 듯 한 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봄날은 오래가지 못했다. 장마당에서 팔리던 그녀의 밀수품을 꽃제비가 훔쳐 달아났는데 그 녀석이 잡혀 치도곤을 당하면서 발각이 되어 이번에는 그녀가 로동교화소로 보내졌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고 그녀는 말하면서도 치를 떨었다. 아주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그녀는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어차피 굶어죽을 바에는’ 하는 생각으로 기회를 노려 탈출을 감행했다고 말했다. 구내식당의 그 소박한 식판을 가리키며 “이 밥에 고기국, 이런 진수성찬은 거기선 꿈도 못 꿔요”하고 살짝 웃기도 했다.

그녀는 천신만고 끝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 사이에 아버지는 잡혀간 딸 걱정에 울고 지새다 울화로 병세가 악화되어 돌아가셨고 엄마와 동생들은 사라졌다. 청천병력이었다. 그런데 숨겨준 친척이 소식을 전해줬다. 엄마가 밀수할 때 알던 브로커를 통해 중국으로 넘어갔다는 것이다. 연락처도 알려줬다. 그녀는 몸을 채 추스르지도 못한 채 밀수 할 때의 정보를 최대한 되살려 두만강을 넘었다. 죽을 각오로 일부러 비오는 밤을 골랐다고 했다. 그러나 “중국이라고 어디 쉽겠어요?” 공안에게 잡히면 ‘북송’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짐승처럼 산속에 숨어 지내며 조금씩 이동했는데,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어요” 한 시골 마을에서 밥을 훔쳐 먹으러 민가에 숨어들었다가 주인들에게 들켰는데 하필 그게 천사같은 어른들이라 밥도 얻어먹고 여러 날 딸처럼 지내며 일도 돕고 체력을 회복한 후 엄마가 있다는 심양으로 떠났다고 했다. 옷과 먹을 것과 돈도 챙겨줬다고 했다. “그분들은 제2의 부모님이었어요. 평생 그 은혜를 잊을 수가 없어요. 신고했으면 북송되어 총살될 수도 있었는데” 그녀는 그 말을 하며 잠시 울컥했다. 밀수할 때 배운 중국어가 이동하는 동안 큰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천신만고 끝에 심양에 도착했건만 엄마는 거기 없었다. 대신 소식이 있었다. 남조선에 가 있을 테니 무슨 수를 써서라고 뒤따라오라는 것이었다. “청천벽력이었죠. 그렇지만 망설임은 없었어요. 엄마가 있는 데라면 지옥이라도 가고 싶었으니까요” 그 말을 할 때 그녀의 표정은 단호해 보였다.

TV에서 본 적은 있지만 온통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자세한 것은 줄이지만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위기를 여러 차례 넘기면서 그녀는 북경과 심천과 캄보디아를 거쳐 마침내 인천에 도착했고 하나원에서 엄마와 동생들이 무사히 귀국해 정착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서울에서 그리운 그들을 다시 만났다고 했다. “그 감격은 평생 잊을 수가 없어요. 부둥켜안고 온 식구가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교수님은 그런 거 짐작도 못하시겠죠?”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짐작은 한다. 그러나 막연한 짐작일 뿐이다. 그런 극한 상황을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어찌 그 고충을 제대로 알겠는가.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뭔가가 느껴졌다.

인천공항에 도착한 이후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믿을 수가 없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여기 한국분들은 정말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지금 한국이 얼마나 잘 사는지, 얼마나 대단한지. 중국도 대단했는데 제 눈에는 한국이 중국보다 더 대단한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안보강연을 다니고 있는 거에요” 거짓말 같은 이야기들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게 다 실화였고 그 증거가 실제로 내 눈 앞에서 숨을 쉬며 함께 밥을 먹고 있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이념과 체제라는 것, 자유와 통제라는 것, 국가와 가족이라는 것,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다 인생이기도 했다. 강의 시간에 내 입으로 말하던 ‘실존’이라는 것이 바로 그녀의 말 속에 실제로 살아 있었다. 많은 것을 배웠다.

모TV의 그 탈북자 토크쇼를 볼 때마다 나는 이제 그녀를 떠올린다. 그리고 그녀가 한국이라는 이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부디 실망하지 말고 엄마와 동생들과 함께 오래오래 행복한 삶을 영위해주기를 기원한다. 그녀는 어쩌면 대한민국 여권을 자랑스럽게 내보이며 북경과 심천과 캄보디아를 여행하고 저 만주 시골 마을의 그 제2의 부모님을 찾아뵙고 서울에서 챙겨간 선물보따리를 한 아름 그들에게 안겨드렸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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