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칼럼-죽어도 죽지 않은 존재로, 아름다운 이름으로
현장칼럼-죽어도 죽지 않은 존재로, 아름다운 이름으로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2.01.25 17:15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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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준/제2사회부 국장(합천)
김상준/제2사회부 국장(합천)-죽어도 죽지 않은 존재로, 아름다운 이름으로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에서조차 죽어간다는 말이 틀리지 않다. 죽음은 우리가 탄생하는 순간에 이미 함께하고 있다.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불길한 이야기가 아니다. 삶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죽음과 삶은 함께 간다. 삶 안의 죽음이 있고 죽음 안에 삶이 있다.

만담 한 마디다. 어느 날 한 병원의 영안실에 세 구의 시신이 동시에 도착 했는데 시신들이 모두 다 웃고 있었다. 병원 담당자가 하도 신기해서 운구해온 분에게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셨길래 다들 이렇게 활짝 웃는 표정을 하고 있는 건가요? 그랬더니 첫 번째 사람은 갑자기 10억 복권에 당첨되어 심장마비로 죽었답니다. 두 번째 사람은 아들이 수능만점을 받아서 흥분하다가 죽었답니다. 세 번째 사람은 벼락에 맞아 죽었답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분들이 웃는 건 이해가 가는데 마지막 사람이 웃는 건 이해가 가지 않아서 어떻게 활짝 웃을 수 있느냐고 다시 물어보니 번쩍할 때 사진 찍는 줄 알고 활짝 웃다가 죽었답니다. 좋을 때나 웃을 때도 죽음이 있다는 의미다.

이 땅에서 잘 살기 위한 것도 중요하지만 잘 죽기 위해 필요한 것도 중요하다. 삶이 전부가 아니고 이 세상에서의 삶이 영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은 언젠가 죽어야 할 존재이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든지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고 죽음을 직시하면서 주어진 삶을 소중히 여기고 현재에 집중하면서 좋은 삶을 살려고 애써야 할 것이다.

결국 늙고 죽고 하는 것도 어느 정도는 살아온 방식에 달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좋은 삶의 방식을 유지하며 잘 살아왔다면 잘 늙고 잘 죽어갈 가능성 역시 그만큼 높아진다고 할 수 있다. ‘죽음 연습’이란 책이 있다. 거기서 저자는 ‘죽음연습’은 곧 ‘삶의 연습’이라고 말한다. 삶 속에 죽음이 있고 죽음 속에 삶이 있다는 주장이다. 삶과 죽음은 불가분이의 관계다. 죽음은 살아있는 내 안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 언제나 죽음에 이를 수 있는 존재다. 그래서 늘 죽음을 의식하고 죽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이런 웃으게 이야기가 있다. 죽음이 찾아오거든 환갑(60세)-지금은 부재중이라고 전하라, 고희(70세)-아직은 때가 이르다 전하라, 희수(77세)-지금부터 여생을 즐기겠다 전하라, 신수(80세)-아직은 쓸모가 있다고 전하라, 미수(88세)-쌀을 좀 더 축내고 간다 전하라, 졸수(90세)-조급하게 굴지 말라 전하라, 백수(100세)-때를 보아 내 발로 가겠다고 전하라.

죽음이 누구에게나 오는데 그때에 내가 말할 수 있는 말은 무엇일가? 죽음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필연이다. 살고 있는 우리는 죽음에의 존재다. 만물은 죽은 다음 더 나은 새 생명으로 태어난다. 사람도 죽음 후에 더 놀라운 새 세계가 열린다. 그렇다면 죽음은 누구나 반기고 환영해야 갈 사건이 아니겠는가?

메리 엘리자베스 프라이의 시구다.

‘내 무덤 앞에서 울지 말아요/나는 그곳에 없어요 잠들어 있지 않아요/나는 천 갈래 바람이 되어 불고/눈송이 되어 보석처럼 반짝이고/햇빛이 되어 익어가는 곡식 위에 비추고/잔잔한 가을비 되어 내리고 있어요/당신이 아침의 고요 속에서 깨어날 때/원을 그리다 비상하는 조용한 새의/날개 속에도 내가 있고/밤하늘에 빛나는 포근한 별들 중에도/내가 있어요/내 무덤 앞에서 울지 말아요/나는 그곳에 없어요 죽은게 아니랍니다’

죽어도 죽지 않는 존재로, 죽어서 아름다운 이름으로, 향기로운 삶의 흔적으로 오래오래 남는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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