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너는 어느 쪽
아침을 열며-너는 어느 쪽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2.05.16 17:21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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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명예교수·철학자
이수정/창원대 명예교수·철학자-너는 어느 쪽

48.56:47.83, 지난 20대 대통령 선거의 결과다. 거의 딱 반반이다. 그렇게 갈렸다. 이 숫자는 우리 시대의 가슴 아픈 분열 양상을 잘 드러내 보여준다. 사람들은 이것을 보수와 진보, 혹은 우파의 좌파(가나다순)의 대립 내지 대결로 표현하기도 한다. 국민들 대부분은 각자 이런저런 이유로 이쪽 혹은 저쪽에 가담했다. 이 대립은 집권한 쪽이 아주 잘하거나 아니면 아주 못하거나 어느 한쪽이 아닌 한 아마도 앞으로 5년간 큰 변화 없이 사사건건 부딪치며 우리 사회를 시끌벅적하게 달굴 것이다.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아프다.

이 대립에서 소위 ‘저쪽’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서로서로 살벌할 정도로 적대적이다. 반면 이쪽 즉 ‘우리편’에 대한 태도는 한없이 관용적이다. 소위 ‘내로남불’은 진리(사실적 현상)일 뿐 아니라 지켜야 할 윤리가 된 형국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람을 대할 때 거의 본능적으로 상대방에게 코를 킁킁거리거나 돋보기를 들이댄다. ‘너는 어느 쪽’이냐고. 불행도 이런 불행이 없다. 사람을 어떻게 그토록 선명하게 반으로 나눌 수 있단 말인가? 누구에게나, 어느 쪽에게나 장단이 있게 마련이다. 공과가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왜 이쪽과 저쪽으로 사람들을 몰아넣으려 하는가. 물론 그걸, 그 왜를 누가 모르겠는가. 결집이 즉 패거리가 ‘힘’이 되고 세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게 이익으로 연결이 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 제일 마지막 문장이 ‘단결하라!’라는 단어로 끝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단결이 결국 고약한 분열이라는 것을. 역사를 보면 어떤 강대국도 결국 균열로 인한 분열 앞에서는 무사하지 못했다는 것을. 우리 역사의 가장 아픈 사건인 고구려의 멸망도 결국 그 때문이었다는 것을. 작가 김훈의 저서 중에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라는 것이 있다. 이 제목은 참으로 시사적이다. 이 시대에 대한 최고의 충언이라고 나는 이것을 평가한다. 그렇게 묻지 말라는 것이다. 그게 위험하다는 것이다. 그럼? 이쪽저쪽 가리지 말고 사안별로 평가하면 되는 것이다. 여야-좌우 가리지 말고 잘하는 것은 칭찬하고 못하는 것은 비판하고, 그게 지성인 것이다. 그게 정상인 것이다. 이런 단순한 진리가 왜 통하지를 않는가?

정작 중요한 것은 다른 데 있다. 출퇴근길 도로 위에서 누구나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차선변경을 위해 깜빡이를 넣고 있을 때, 어떤 차는 멈추어 끼워주고 어떤 차는 신경질적으로 더 들이밀며 한사코 끼워주지 않는다. 반대로 안전거리도 없는데 느닷없이 밀고 들어와 끼어드는 차들도 있다. 말하자면 기본 질서다. 지키는 자와 안 지키는 자, 내 생각만 하는 자와 남 생각도 해주는 자의 구별이 있다. 나는 이런 것을 지키기즘과 뭉개기즘, 나만주의와 너도주의 라는 말로 정형화한 적이 있다. 이런 것에 대해서는 ‘너는 어느 쪽?’인가를 물어봐야 한다. 그런 것이 소위 ‘질’이라는 것을 결정한다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 사회에는 아직 ‘너’는 안중에 없이 ‘나’만 생각하는 저질들이 너무 많다.

원리는 아주 간단하다. ‘나’ 내지 ‘우리’라는 것의 좌표 설정이다. ‘너’ 내지 ‘상대’의 의식[혹은 배려] 여부다. ‘나’를 낮추라는 것과 ‘남’을 배려하라는 것은 모든 위대한 철학의 공통분모다. ‘어짊이란 남을 사랑하는 것이다’...(공자) ‘모든 존재에 나라는 것은 없다’(부처) ‘너 자신을 알라’(소크라테스) ‘네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예수) 이 모든 명언들의 근저에 자기에 대한 낮춤과 남에 대한 관심·배려·존중이 깔려 있다. 이런 가치관에 대해서는 확실한 이쪽과 저쪽이 있다. 하여 나는 철학자의 자격으로 우리의 동시대인들을 향해 물어보고 싶다. 당신은 어느 쪽이냐고. 이 물음에 대해 가슴이 철렁하며 자기를 돌아보는 사람은 아마 이쪽 편이고 가슴에 불끈하고 반감이 이는 사람은 아마도 저쪽 편일 것이다. 물론 그것은 항상 가변적이라 그때그때 경계를 넘나드는 게 얼마든지 가능하다. 문은 항상 열려 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나니’라는 예수의 말을 여기에 인용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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