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민칼럼-어느 스님의 죽음
도민칼럼-어느 스님의 죽음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2.07.06 13:03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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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지/지리산문화예술학교(지리산행복학교)교무처장

신희지/지리산문화예술학교(지리산행복학교)교무처장-어느 스님의 죽음


몇 해 전 독실한 크리스챤이면서 효자인 가난한 한 작가의 울먹이는 전화를 받은 적이 있다. 어머니가 편찮으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임종이 가까워 온 모양이었다. 중환자실에 계시는데 깨어날 가망은 없는 상태에서 병원비는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돈 때문에 어머니의 호흡기를 뗀다는 것도 자식으로서 도리가 아니어서 그는 매우 괴로워하고 있었다. 또 다른 경우는 말기 폐암 환자인 아버지가 처음 병원에 와서는 자식들을 생각해서 연명치료를 거부하겠다고 사인을 했는데 막상 통증이 심해지자 수술을 해달라고 사정을 하는데 부위가 수술을 할 수 있는 부위도 아니고 다른 장기로도 번져 더 어찌 해 볼 도리가 없는데도 가족들에게 난리를 치고 있다는 이야기를 지인에게 들은 적이 있다.

유병장수(有病長壽)의 시대라고 하던가? 수명은 늘었는데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이 아니고 약봉지는 늘고 그나마 약으로 감당할 수 있다면 다행인데 병원에서 숨만 붙은 체 아무런 의사소통도 하지 못하고 의사의 진단만 기다리는 호스피스 병동의 환자들이 가득한 시대다. 이제 어찌 살 것인가? 만큼 어찌 죽을 것인가? 도 생각해보아야할 중년의 나이가 되어 얼마 전 가까운 분의 죽음을 맞이했다.

우리나라에는 종교를 믿는 인구는 40%가 넘는다고 한다. 차츰 종교인이 줄어들고는 있지만 종교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60%이상이라고 한다.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유전과 관습에 의한 샤머니즘까지 합치면 국민 대다수가 영적인 존재의 힘을 믿는 편이다. 그러나 나는 종교인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고 살아왔다. 올바르게 살라는 것이 모든 종교의 근간일 텐데 종교를 가지고 믿음으로 사는 이들이 그런 삶의 교리를 따르기보다 자신의 안위만을 위하여 사는 경우를 종종 목도하다보니 구복(求福)의 종교에 고개를 돌리게 되었다. 더구나 종교와 종교인을 이어주는 성직자에 대해서는 기대를 가졌다가 더 실망하게 된 경우도 많았다. 그 와중에 그 분을 존경하고 따르게 된 이유도 성직자의 위계(位階)로 사람들을 대하지 않아서였다.

한학(漢學)에 밝아 평생을 경전 연구에 몰두하신 연관스님, 말기암 진단을 받고 다른 장기로까지 전이되어서 회생불가하다는 의사의 말을 듣자 그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일순간에 정리하기 시작했다. 조계종 최대선원인 봉암사의 큰 어른으로 도서관장을 맡고 계셨지만 조용히 사찰을 빠져나와 요양원이 있는 부산 관음사의 지현스님에게 마지막을 의탁하셨다. 두 분은 3년 전 지현스님의 은사인 보성스님의 부도탑 비문을 써 준 인연으로 알게 되었다고 한다. 평소 누구에게도 폐가 되는 것을 늘 염려하였던 만큼 요사채에 드신지 4일 만에 곡기를 끊고 8일이 되는 날 물마저 끊음으로 12일 만에 스스로 존엄한 죽음을 맞이했다. 평소 성정으로 보아 마지막 곁을 지키는 고담스님의 시중을 받는 것도 미안해 하셨으리라 짐작된다.

영결식에서 양산부산대병원장을 지낸 백승완교수는 식순에 없지만 한 말씀 드려야겠다며 연관스님의 결기에 놀라워했다. 수많은 호스피스 환자들을 보아왔지만 연관스님과 같이 초연한 경우는 없었다고 했다. 수행자의 죽음은 어떠해야 하는지? 불교에서 삶과 죽음을 따로 보지 않는 것을 당신 스스로 증명하고자 병환도 끌어안고 가시면서 진통제 한 대 맞지 않고 인내하는 모습에 다들 경이로워했다. 물을 끊기 전 의식이 명료할 때 늘 참선만 한 스님이라 수중에 큰돈은 없지만 인세로 모은 돈을 미얀마 아이들을 돕는 <사단법인 세상과함께>에 반은 기부하고 반은 국내의 어려운 아이들에게 써달라고 하면서 거창한 다비식이나 부도탑을 쓰지 말아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셨다고 한다. 평생 도반인 수경스님은 그 뜻을 바로 받아 섬진강 하동포구 가장자리에 유골을 뿌려서 고인의 뜻을 따랐다.

우리는 과연 막상 죽음에 다다르면 병원치료를 거부하고 존엄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 의사가 치료를 하면 조금 더 살 수 있다고 했을 때 이만큼 살았으니 이제 남은 생을 정리하겠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연관스님의 죽음을 보면서 회생이 불가한 경우가 오면 연명치료거부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아름답게 살 권리가 있는 것처럼 우리는 모두 아름답게 죽을 권리도 있지 않은가!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지만 많은 것을 남긴 연관스님의 죽음을 통해 앞으로 남은 삶을 잘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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