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여성들의 국채보상운동<2>
진주성-여성들의 국채보상운동<2>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2.08.24 17:01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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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여성들의 국채보상운동<2>

지역 부호 강주식(姜周提)(1889~1959)진주시 중심지 대안동 1동에 거주하고 있었다. 바로 옆집에는 얼마 전 이사 온 강상호(형평운동가로 전국에 전파됨)가 살고 있었는데 각종 활동에 동참하게 된다.

진주시 봉래동과 옥봉동 사이에 영국령 호주 선교사들이 장로 교파의 선교를 위해 진주에 도착해 전도하기 시작하자 강주식이 참여하게 된다.

봉양학교(현 봉래초등학교)설립 당시에도 설립위원으로 동참했다.

전국 최초의 지방 일간지 <경남일보>창간 당시 1909년 10월 15일에 도우고 회계와 회계감사장으로 활동하고 진주여고, 진주고 설립 발기인으로 활약하고 1923년 3월 설립 기금 1천원(현 1억원)을 내기도 했다.(동아일보 1923년 3월 23일)

1907년 3월 진주 기생들이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을 전개하면서 일반인 또는 유림들에게 가담하지 않고 단독으로 여러 기생들을 독려해 모금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웃에 있는 기생들이 단체를 조직해 모금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강주식이 소식을 전해 듣고 부용(芙蓉) 기생을 찾아 말하기를 “나라와 민족을 위한 일이니 국채보상의 모금 창구를 단일화 하자”라고 말했다.

부용 기생이 단번에 “안됩니다, 강주식 당신은 당신대로 하고 우리는 우리 대로 하겠다”라고 거절했다.

수일 후 일본 순사를 대동하고 나타나 지금까지 모금한 돈을 내놓고 단일화하자고 협박하였다.

부용은 그동안 모은 전액을 모두 빼앗기자 억울하고 분하여 신문에 호소문을 올려 그 내용이 보도되었다. (대한매일신보 1907년 3월 20일)

“연꽃이 향기를 품다”라는 제목으로 부용의 글이 실렸다. 진주기생 부용의 글을 보니 ‘군주의 교화를 입은 백성이 어찌 암수의 구별이 있겠는가. 의봉루 아래에서 애국부인회를 결성했다.’라고 했다.

일본 순사는 물러나고 강주식은 모임을 저지하게 되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서울 대안동에 사는 국채보상부인회 회장 신소당이 강주식에 대하여 강하게 비난을 하게 되었다.

‘강주식은 어떤 자이기에 억지와 세력을 믿고 감히 해를 입히려 하니 만인의 죄인이요. 나라의 도적이다’라고 기고하게 된다.

한 마을에 살면서 서로 싸우면 어찌 되겠는가. 지역의 재력가요, 발언권이 강한 자가 이길 수 밖에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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