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매국노
아침을 열며-매국노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2.08.24 17:01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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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환/국학강사
김진환/국학강사-매국노

우리나라가 여기까지 오기까지 수많은 매국노가 있었으며 그와 반대로 풍찬노숙하면서 국혼을 지켜온 애국자도 많았으니 우리는 그분들 덕분에 오늘의 풍요를 누리고 있다. 국학의 관점으로 볼 때 단군 조선시대에도 매국노는 있었다.

그들은 단군 47대 고열가 단군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던 제자들이자 중신이었고 소위 역천자들이라고 불리었다. 수많은 역천자로 인해 국권과 국혼이 끊어질 것을 내다본 고열가 단군은 가슴으로 눈물을 흘리시고 국문을 닫아버렸다. 국학에서는 이를 폐관이라고 한다. “오호통재라 이 일을 어찌할꼬 더 이상 이 나라가 천손의 자긍심도 홍익의 국혼도 회복시킬 여력이 없으니 장차 2000년 동안 나의 자손들이 얼마나 어려운 고통 속에 헤맬는지. 눈 앞이 아득하구나” 하시면서 스스로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셨다. 이후 천손들은 이전투구처럼 하면서 뿔뿔이 흩어졌고 고구려 백제 신라가 들어섰다. 천손이 아닌 지손이 된 이들은 서로 잘났다며 싸우게 되었고 그 안에서는 어이없는 매국노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매국노들은 그들이 선택하는 몇 가지 명분이 있다. 부귀영화, 맹목적인 신앙심, 나라가 형편없다고 생각한 경우나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한 경우, 정치투쟁에 밀려난 경우, 내 나라보다 남의 나라가 부러운 경우 등이다. 고구려 시대의 부기원과 손대음은 대표적인 매국노이다.

그들은 고구려가 잘 나갈 때는 온갖 호의호식을 누리다가 나라가 어려워지자 고구려를 배신하고 백성들을 당의 노예로 팔아먹고 자신이 책임지고 있던 백암성을 당에 내어주고 당 벼슬을 얻는 등 자신들의 또 다른 출세를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남생도 권력다툼 끝에 동생들에게 밀려 당나라의 대장군으로 다시 나타나 조국 고구려를 배신하는 매국노가 되었다.

다음은 백제의 매국노 예식진이 있다. 당의 입장에서 백제 멸망에 절대적 공헌을 한 인간으로 백제의 중신이면서 의자왕을 당나라에 팔아넘겼다. 2007년 그의 묘지명이 발굴되면서 그 진상이 드러났다. 신라의 매국노는 경순왕이다. 아들 마의태자가 그렇게도 말렸건만 저항 한 번 제대로 못 하고 맥없이 왕건에게 나라를 던졌다. 그 아래 있던 신하들은 나라가 망해도 자기들은 한자리할 수 있을 거라는 어이없는 기대가 있었고 1000년 신라는 그렇게 사그라져 갔다. 후백제는 다름 아닌 견훤이다. 자기가 창업한 나라를 자기가 무너뜨린 황당한 매국노이다. 신검이 난을 일으키고 왕이 되자 이를 자신의 부덕함으로 보지 않고 왕건에게 투항하였다. 나라를 도매로 팔아넘긴 것이다. 고려 때도 없지 않다. 대표적인 자가 바로 홍복원이다. 몽고의 침입 때 그의 아버지인 홍대순이가 항복한 이후 몽고의 길잡이가 되어 3대째에 이르기까지 몽고에 나라를 팔아먹은 자로 결국은 몽고의 장수들에게 몽둥이로 맞아 죽는다.

다음은 조선, 내가 볼 때는 대표적인 인물이 이성계이다. 고려말 명나라가 휘청거리고 있을 때 최영 장군을 도와 만주 땅을 회복하고 국권을 튼튼하게 하고 국방에 힘을 썼더라면 고려는 나라다운 나라가 되었을 텐데 이성계는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나라를 배신한 자가 나라를 세운 후 결국 그 나라는 일본에 무참하게 무릎을 꿇었다. 이성계가 없었더라면 아마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는 치욕은 당하지 않았으리라 그가 세운 나라는 처음부터 비틀거렸고 수많은 충신이 이슬처럼 사라져 갔으며 결국 자기들의 잇속을 챙기기 500년쯤 수많은 매국노가 득실거렸고 일제 치하에서는 더욱 성장했고 그들은 지금도 뿌리의 건재함으로 자기들의 배를 불리고 있다. 종교적 맹신으로 나라를 팔고자 했던 자도 있었다. 바로 황사영 백서사건이다. 황사영은 청에 있던 구베아 주교에게 조선의 천주교 탄압을 알리며 여러 가지 요구사항이 적힌 편지[帛書]를 보냈다. 이 편지에는 신앙의 자유를 위해 서양 군대를 동원하여 조선을 위협할 것, 신부를 상주시킬 것, 조선을 청나라의 한 성으로 만들거나, 청의 공주를 조선의 왕비로 삼아 충성의 기초로 삼을 것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이 편지는 구베아 주교의 손에 들어가기 전에 발각되어 황사영은 처형되고 말았다. 외세의 힘을 빌려 신앙의 자유를 지키려는 황사영의 백서는 조선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으며, 이후 지속적인 천주교 박해의 근본 원인이 되었다. 신유박해 후,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때에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다소 완화되었으나, 1839년 헌종 때 권력을 장악한 조만영은 기해박해를 일으켜 다시 천주교를 탄압했다. 또한 병인박해는 고종 3년인 1866년부터 1871년까지 계속되었다. 조선의 천주교 박해는 폐쇄적인 주자학적 세계관에 갇혀 기존의 질서만을 고수하려는 집권층의 편협함과 외세의 힘에 의지해 신앙의 자유를 누리려 했던 일부 천주교도들의 일탈이 어우러져 초래된 민족사적 비극이었다. 권력과 종교가 민심을 중간에 두고 조화로움과 다양성을 인정했더라면 발생하지 않을 사건이었지만 종교적 맹신의 역효과는 이리도 여실히 증명되었다. 매국노는 매사노, 매조노, 매가노와 함께 공존한다. 지금 이 시대 우리 속에 함께 살면서 매국하는 자들을 가려내는 방법은 무엇일까, 함께 고민해 볼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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