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우리말’에 대한 한 소고
아침을 열며-‘우리말’에 대한 한 소고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2.09.19 16:46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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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명예교수·철학자
이수정/창원대 명예교수·철학자-‘우리말’에 대한 한 소고

내가 속해 있는 한 전문학회에 ‘우리말로 철학하기’를 내세우고 열심히 애쓰는 동료들이 있다. 동조하는 이도 있고 삐딱하게 보는 이도 있다. 나는 일정 거리를 두고 그들의 활동을 그저 흥미롭게 지켜본다. 이런 식의 ‘거리두기’는 자칫 찬성파와 반대파 양쪽 모두로부터 미움 받을 우려가 있지만 이것도 하나의 ‘입장’임은 인정받을 필요가 있다.(참고로 정치적 견해도 꼭 마찬가지다. 예민한 이슈에 대한 양비론과 양시론은 그리고 중도론은 별로 인기가 없거나 공격대상이 되기도 한다.)

나는 누구 못지않게 ‘한국어’를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토착화된 외래어를 굳이 적대시하지는 않는다. 통계조사를 본 적은 없지만 한국어의 절반 이상이 아마도 (원래 중국어인) 한자어로 되어 있을 것이며 커피, 트럭, 버터, 빵, 스파게티 등 영어를 위시한 서구어도 엄청나게 많을 것이다. 다꽝, 와리바시, 벤또 등 일본어는 대부분 퇴출되었지만, 노견, 언도, 지분 등 아직 남아서 통용되는 것도 더러 있다. 철학 과학 납득 각서 견본 낙서 역할 입장 취급 등은 원래 일본태생이지만 그게 일본어라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경우도 많다. (‘과학’은 심지어 우리의 원수 이토 히로부미가 만든 말이다.) 외국어의 과용은 확실히 좀 꼴불견이지만 문맥 속에서 자연스럽게 통용된다면 그 ‘시민권’을 인정해줄 필요가 있다. coffee는 영어지만, 커피는 한국어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말주의자들이 사용하는 이른바 ‘순우리말’이란 말들 중에 거의 의미불명인 채 거의 통용되지 않는 것들도 없지 않다. 이를테면 ‘막치’ ‘혜윰’ ‘윤슬’ ‘미르’ 등등 그 수도 적지 않다. 70년 가까이 한국인으로 살아왔지만 50이 넘기까지 거의 들어본 적이 없던 한국말이다. 여기서 처음 들어보는 분들도 아마 없지 않을 것이다. 이 중 일부는 그 어감이 아주 좋아 적극 유통되어 확실히 자리잡았으면 하는 것들도 있다. ‘혜윰’ ‘윤슬’ ‘미르’ 등이 다 그렇다. ‘생각’ ‘물비늘/잔물결’ ‘용’보다는 어감이 확실히 더 좋다.

일부 사투리에도 그런 것이 있다. ‘짠하다’ 같은 전라도 방언은 사용하는 이가 많아 거의 표준어가 되다시피 했다. ‘아제/아지매’ ‘할배/할매’ 같은 경상도 방언도, ‘얼추’ 같은 충청도 방언도 마찬가지다. 경상도 방언 중 ‘단디 하다’ 같은 것도 거의 전국적으로 이해된다. ‘파이다’(별로다/안 좋다) ‘포시랍다’(고생 없이 호강스럽다) ‘덧정없다’(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다) 같은 말도 보급대상이다.

‘뫼’나 ‘가람’ ‘하늬’ ‘라온’(즐거운) ‘미리내’ 같은 고어는 이미 어색해 그것을 되살리는 것은 쉽지 않겠지만, 사람들이 자꾸 사용해 통용이 되면 자연스런 현대 한국어로 자리잡을 수도 있다. ‘에미나이’나 ‘얼음보숭이’ 같은 북한말도 마찬가지다.

‘갓길’ ‘꽃샘추위’ ‘에움길’ ‘그녀’ ‘거리두기’ 같이 새로 만들어서 통용시킨 아주 좋은 사례들도 있다. ‘시나브로’ ‘둔치’ ‘도시락’처럼 옛말을 되살려서 정착시킨 사례들도 있다. 한편 걸상 말본 셈본처럼 한때 통용되다가 슬그머니 사라져버린 말들도 더러 있다.

참고로 독일어에도 월화수목금토일 요일을 나타내는 말들이 모두 -tag로 끝나는데 토요일인 Sonnabend만이 그 형태가 달라 Samstag라는 방언이 그 대신 거의 표준어처럼 통용되기도 한다.

언어는 생물이라 끊임없는 변화를 겪는다. 1000년 전 100년 전의 한국어와 지금의 한국어가 다르듯 100년 후 500년 후의 한국어도 지금의 한국어와는 다를 것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의 언어사용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나는 미래의 한국어가 지금보다 더 편리하고 아름다운 것이 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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