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민칼럼-시내버스를 타는 사람입니다(5)
도민칼럼-시내버스를 타는 사람입니다(5)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2.10.05 17:05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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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선/시조시인·작가
강병선/시조시인·작가-시내버스를 타는 사람입니다(5)

그때 도동초교 버스 정거장이 새벽공기가 차가웠다. 정말이지 조마조마한 맘으로 20분도 넘는 시간을 기다리고 서 있었다.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7~8명으로 늘어난다.

모두다. 시내버스들의 횡포는 비단 오늘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오늘처럼 황당한 승차 거부하고 불친절하다는 얘기를 이구동성으로 해댔다. 무거운 짐이 있고 부피가 큰 물건이 있는 승객은 태우지 않고 그냥 지나가 버린다. 어디 가는 버스인지를 몰라서 노선을 물어보면 친절하게 말해주는 기사는 없다는 등, 기분 상한 일을 당했던 얘기다. 허드렛일을 하는 일터에 출근 시간이 바빠서 택시를 탈 수밖에 없었다. 는 얘기들이 나도 동감하는 것들이다.

다음날 새벽에도 오래 기다리다가 달려오는 버스를 세웠으나 어제와 같은 일을 당하고 말았다. 마침 도립병원 쪽인 시 외곽 쪽으로 가는 다른 노선버스가 있어 타고 가다 내려 현장까지 걸어서 갔었다. 이런 일을 당할 때는 당국에 신고라도 하고픈 생각이 들다가도 무슨 일이 그렇게도 바쁜지 흐지부지 넘어가 버리는 수가 많다.

이들 버스의 횡포로 인한 내 나름대로 좋지 않은 감정 때문에 불편을 감수하면서 두 노선버스는 타지 않기로 맘먹고 다른 번호의 버스만 탔었다.

이런 일이 있고 난 후 몇 달 후에 결국은 아파트 공사현장에 적성이 맞지 않아 일을 그만두고 말았었다.

가끔 시내에 볼일 때문에 나가면서는 옛날 감정은 잊은 채, 버스를 탈 때는 어느 날 바람처럼 사라져 버린 두 노선 버스회사가 어찌 된 영문을 몰라서 궁금하다. 당시에는 나 한 사람이 불매운동을 한다며 탑승 거부한다고 눈 하나 깜박할 버스회사이겠는가. 그렇지만 당시는 불편을 감수하기로 작정하고 이들 두 노선버스를 타지 않았었다. 시 외곽지역 농촌 벽지에 다니는 버스를 타기로 했었다. 언제 올 줄도 모르지만 무작정 기다렸다 타기 일쑤였으니 부모님과 할아버지에 할아버지의 대를 이어 디엔에이를 물려받은 강고집인지도 모른다.

불현듯 권불십년(權不十年)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그토록 기세등등하던 황금노선 시내버스가 시 당국과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이 분명한데 다른 버스를 대체하지 않은 시 당국도 원망스럽다.

집현과 미천면 지역을 운행하는 시 외곽노선 버스 기억이 떠오른다. 차에 오르는 승객에게 어서 오십시오. 라고 인사하며 맞아 주니 기분 좋았었다. “안녕하십니까.” 라고 맞받아 인사하고 내릴 때는 “수고하십시오.” 인사를 잊지 않았었다. 이럴 때마다 버스 승객들은 나를 이상한 사람처럼 쳐다보기도 했다.

아침 새벽 시간에는 시내에서 나오고 들어가는 버스들이 텅텅 빈 차로 다니기 일쑤지만, 농촌 지역에서 나오는 버스에는 앉을 자리가 없다. 서서 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감자나 고구마와 채소를 담은 비닐 비료 포대나 마대와 보따리들이 통로를 꽉 메우던 풍경은 한 폭의 수채화였다.

열무, 배추와 고구마 줄기, 호박잎과 풋고추 등. 이런 장거리 채소들을 각자가 보따리 보따리를 몇 개씩 만들어서, 새벽시장에 내다 팔려는 사람들이다. 옛날에 어머니 같은 모습으로 나이 많은 사람들이라지만, 기껏해야 나보다는 몇 살 위의 사람들이며 열 서너 살도 정도 더 많아 보이는 할머니도 있었다.

이런 모습들을 보면 눈시울이 찡해진다. 근검절약하며 이들처럼 살았던 어머니가 그려지며 이런 모습이 어머니들의 삶이었구나 하며 되뇐다. 지금은 세상에 계시지 않은 어머니를 떠 올려 보다가 다시 또, 흰머리에 수건을 쓴 어머니 같으신 분에게 시선이 오래 머무른다.

이런 모습들은 새끼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아등바등하며 악착같은 어미의 열정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모습들을 버스에 탄 다른 승객들은 지저분하고 냄새 때문에 인상 찌푸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런 분들이 살아가는 모습들이 나에게는 그렇게도 아름다운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오래전에 천국에 가 계시는 어머니가 계속해서 눈앞에 그려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시골에서 이른 새벽에 시내로 들어오는 버스에 직접 텃밭을 가꾸고 농사지은 채소들을 비닐포대와 마대에 꾸린 보따리들은 금액으로 환산한다면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옛날에 고향 면 소재지에 5일마다 열리는 장날이면 함지박에 고구마나 무를 가득 담아 머리에 이고, 십 리 길 장터에까지 힘들게 걸어가셨던 어머니가 자꾸만 눈앞에 성글어지면서 어느새 두 눈에 눈물이 괸다.

남이야 시내버스를 타던 마대나 비료 포대에 쌀을 담았고 팥을 담더라도 관심 두지 않고 조용히 있다가 아무 말 없이 잠자코 앉아 있다가 시내버스가 집 앞 버스정류장에 당도했을 때, 내리면 될 일이지 않은가.

그렇지만 미주알고주알 물어보며 대화를 하고 싶어 이들에게 말을 걸어 보고 싶었다. “어느 동네서 오십니까? “안간 에서 옵니다.” “안간 어딥니까? “아래실 동네입니다.“ “어디로 팔러 갑니까?” 이처럼 내려야 할 정류장이 다가올 때까지 서로 단 문답이 이어졌다. 이는 곧 나이가 들어가면서 변화되어 달라진 내 모습이다.

시내만을 운행하는 배짱 좋은 운전기사들만 봤었다. 그러다가 시 외곽 농촌 마을에서 비닐 비료 포대와 마대에 보따리 보따리를 만들어 주렁주렁 매달은 할머니들을 가득 태우고 시내로 들어오는 버스 기사가 아름답게 보이고 존경스럽다. 그리고 자기가 운전하는 버스에 탄 손님이라는 의식이 투철해 보였다.

그때 승객이 나이가 많든 적든 남자나 여자 가릴 것 없이 ‘안녕하세요. ‘어서 오십시오’ 하며 인사를 했었던 친절 기사 아저씨 모습이 지금도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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