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주/국학원 상임고문·화가
아름다운 단풍의 계절이 가고 성큼 겨울이 다가왔다. 뭇 생명은 겨울이 되면 힘을 저장하며 새로운 탄생을 기약한다. 사람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인명은 재천이라지만 올해 우리의 곁을 떠난 인재들이 많다. 2월 26일, 이어령 교수가 향년 88세로 돌아가셨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석학으로 생명자본과 갓길과 88올림픽의 굴렁쇠 문화 창시자이다. ‘축소지향형의 일본인’이라는 저서로 일본의 민족성을 예리하게 파헤쳤다. 이중적이면서도 모순적인 일본인의 특성을 간파한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에 필적하는 명저이다. 디지털과 아나로그를 합성한 ‘디지로그’라는 새 낱말로 전인미답의 인류문화를 압축하였다. 그는 한국말로 세계의 현상을 가름한 천재였다. 이어령의 마지막 궤적은 병마에 시나브로 침식되어가는 감성을 형형한 지성으로 극복하는 마무리의 연속이었다. 시시각각 몸을 점령해 오는 죽음을 초인의 횃불처럼 형형하게 응시하였다. ‘마지막 수업에서’는 이윽고 죽음을 초탈하여 생명을 찬미한다. “죽음은 5월에 핀 장미처럼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대낮이지. 장미 밭 한복판에 죽음이 있어. 죽으면 ‘돌아가셨다’고 하잖아. 탄생의 그 자리로 가는 거라네. 고향이지.” 우리들의 자랑스러운 사람 이어령은 극강의 고통 속에서도 죽기 하루 전 까지 삶의 문을 활짝 열고 이웃을 맞이했다. 그리고 진짜 죽음은 슬픔조차 ‘사라진 상태’라고 정의한다. 환한 대낮, 이어령은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죽음과 포옹함으로써 자신의 말과 삶을 완성한다. 이것은 그의 사명이었다.
6월 8일에는 송해 씨가 눈을 감았다. 향년 95세로 전국노래자랑 진행자로 오랫동안 국민들에게 웃음을 준 ‘원조 딴따라’이다. 6월 23일에는 20세기 대한민국 경제학계의 태두이자 정치인 조순 교수가 향년 94세로 별세 하였다. 그의 희고 긴 눈썹 백미(白眉)는 초탈한 도인을 연상케 한다. 밖으로는 러시아의 ‘미하일 고르바쵸프’가 향년 8월 30일 91세로 길을 떠났다.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으로 소련의 해체와 냉전종식의 물꼬를 튼 세기적인 정치인이다. ‘고르비’라는 애칭이 잘 어울리는 그는 소련 초대 대통령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다. 9월 8일,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도 오랜 왕좌에서 내려와 하늘로 향하였다.
‘어른’은 누구일까? ‘어른’은 우리의 고유의 말인 ‘얼’에서 나왔다. 한민족의 무의식에는 번역되기 힘든 ‘얼’의 문화가 넓고 깊게 자리하고 있다. 얼차려, 어리석다(얼이 썩었다), 얼간이(얼이 갔다), 얼찬이(얼이 꽉 찬 사람)와 같은 말이 아주 많다. ‘얼’은 어울림이고 조화력이다. “우리는 한얼 속에 한울 안에 한알이다.“ 라는 깨달음의 말이 전해온다. 남녀가 어울릴 때 ‘얼레리 꼴레리’라며 놀린다. 남자의 알과 여자의 알이 어울려 알라(아기)가 된다. 알라는 커서 어린이가 되나 어울림이 아직 여리기에 ‘어린이’이다. 어린이는 넓은 세상에서 얼이 너른 ‘어른’이 된다.
인생의 신산고초를 겪고 삶과 죽음을 초월하여 얼이 신처럼 밝아지면 비로소 신명한 ‘어르신’이 된다. ‘어르신’은 가장 영광스러운 호칭으로 한민족의 어르신인 단군 왕검의 건국이념은 홍익인간(弘益人間)이다.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라’는 것이 곧 겨레의 사명이다.
우리 모두는 이미 이러한 사명을 받고 태어났고 생사 간에 그 사명을 관통하는 사람이 곧 진정한 ‘어르신’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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