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민칼럼-고흐의 아를 시대와 나의 빈롱 시대
도민칼럼-고흐의 아를 시대와 나의 빈롱 시대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3.03.06 16:08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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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옥/시인·창신대 명예교수
이상옥/시인·창신대 명예교수-고흐의 아를 시대와 나의 빈롱 시대

고흐에게 아를 시대가 있다면 내게는 빈롱 시대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고흐와 필부인 나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송구스럽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고흐의 아를 시대에 나의 빈롱 시대를 투영해 보는 것은 지금이 생의 마지막 황금기여서 그렇다. 고흐가 아를 시대를 생의 절정으로 수 놓았듯 나 역시 그랬으면 한다.

프랑스 남부 부슈뒤론주 론강 하류의 왼쪽 기슭에 소재한 도시 아를이 세계인의 가슴에 새겨져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고대 로마풍의 원형 극장과 성 트로핀 성당 등의 유적도 유적이거니와 고흐의 유명한 작품들의 배경이 되었기에 그렇다. 고흐가 10년의 짧은 화가로서의 생 가운데서 아를에서 활동한 것은 불과 15개월에 지나지 않지만, ‘고흐의 아를 시대’라 호명하며 주목하는 것이다. 고흐는 아를에서 200여 점의 그림을 그려 그의 유니크한 예술의 한 경지를 만들어냈고 화가로서의 자의식을 드러내는 많은 글을 썼다.

60세에 대학에서 명퇴하고 바로, 중국 하남성 성도 정주 소재 정주경공업대학교로 자리를 옮겼던 때가 2016년이었다. 중국에서 2년을 체류할 때도 수업이 없을 때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글 쓰는 카공족으로 지냈지만 베트남에서는 더욱 그렇다. 덧붙여 셀프 포트레이트 사진 작업도, 유튜브 작업도 일상으로 한다. 지난해 8월에는 대학을 명퇴하지 않았어도 정년퇴직을 했을 것이다. 지금 베트남 메콩대학교에서의 생활은 덤이다.

엊그제 학교 앞 자주 가는 밤의 카페 ‘GOLDTE0A’에서 커피를 마시는데, 느닷없이 고흐의 그림 ‘아를의 포롬광장의 카페 테라스’가 떠오르며, 고흐의 아를 시대에 나의 빈롱 시대가 투영된 것은 또 무슨 까닭이었을까. 고흐는 아를에 와서 화가들의 공동체를 꿈꾸며 화가들을 초대 했는데 고갱만이 아를로 와서 함께 작업을 했다. 개성이 강한 둘은 시시때때로 부딪쳤다. 고흐는 고갱과 다툰 끝에 면도칼로 자신의 귀를 잘랐다. 결국 고흐와 고갱은 예술과 성격에 대한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고갱은 다시 파리로 돌아갔고, 고흐는 병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면서 아를 시대를 마감한다. 고흐는 아를 시대 이후 곧 권총 자살로 37세의 짧은 생을 마감한다. 고흐와 고갱은 겨우 2개월 같이 지내다 헤어졌다. 그런 가운데서도 고흐는 그림 그리는 것 외에도 독서와 집필을 멈추지 않았다.

고흐는 그림에 대해서 카페에서 고갱과 진지한 담론을 나누며 화가로서의 이상적인 공동체 생활을 꿈꿨지만 좌절로 끝난다. 실제로도 고흐와 고갱은 아를의 ’카페 드 라 가르’를 즐겨 찾기도 했다. ’카페 드 라 가르’를 고흐가 그린 것이 그림 ‘아를의 밤의 카페’다. 카페는 고흐에게 그나마 안식처가 됐던 것 같다. 아를 시대 가장 유명한 그림의 하나가 ‘아를의 포롬광장의 카페 테라스’이다. 이 그림에 대해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밤을 배경으로 빛나는 광장은 밝은 노란 색으로 그렸단다. 특히 이 밤 하늘에 별을 찍어 넣는 순간이 정말 즐거웠어”라고 말했다. 아를에 오는 관광객들은 ‘아를의 포롬광장의 카페 테라스’의 카페 테라스를 보기 위해서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지금 그림 속의 카페는 ‘카페 반 고흐’로 이름이 바꿔져 있다. 그림으로 보는 ‘아를의 포롬광장의 카페 테라스’의 강렬한 노란 채색과 별은, 고흐의 생에 대한 뜨거운 열망과 이상이었다 해도 좋다.

굴곡 많은 고흐가 파리를 떠나 아를 시대를 연 것처럼 지금 나의 빈롱 시대가 생에 있어서 덤으로 주어진, 내 시의 한 절정으로 개화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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