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11)
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11)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3.04.10 16:03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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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11)

▶로마시대의 정치가·웅변가·문학가·철학자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BC106~BC43·63세):로마의 집정관이 되어 카틸리나의 음모를 폭로하고 ‘국부(國父)’라는 칭호를 얻었다. 로마 공화정 말기에 눈부시게 활약했던 키케로 역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죽은 후 안토니우스의 정적(政敵)이 되면서 키케로는 안토니우스가 보낸 자객(刺客)에 의해 살해되었는데, 죽은 후 그의 손이 잘리고 혀에 금바늘을 꽂은 채로 의회 연단에 전시되었다고 전한다. 손이 잘린 것은 그가 쓴 글, 혀에 바늘이 꽂힌 것은 미래의 웅변가에 대한 경계의 의미였다고 한다. 저서로는 ‘국가론’, ‘법률론’, ‘의무론’, ‘최고선악론’, ‘노년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등이 유명한데 정치적 박해와 내란 등의 어려운 시기에 저술한 책이라는 점이 더욱 놀라움을 자아내게 한다. 그는 다음과 같은 유언과 명언을 남겼다.

유언:자네가 하고 있는 행동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잘못되었어. 들어라 나졸들아 너의 소행이 옳다고 생각하거든 나를 쳐 죽여라.

명언:책이 없는 방은 영혼이 없는 육체다. 더 높은 곳에 있을수록, 겸허하게 걸어야 한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지만, 바보는 실수를 집요하게 끌고 간다. 감사하는 마음은 최상의 미덕일 뿐 아니라 모든 미덕의 아버지다. 친구는 두 번째 자아다. 적은 당신을 죽일 수 있지만, 오직 친구만이 당신 가슴을 아프게 한다. 인류가 세기를 반복하면서 되풀이하고 있는 여섯 가지 실수는 첫째 다른 사람을 짓밟아야 자신에게 이득이 생긴다고 믿는 것. 둘째 변할 수도 고쳐질 수도 없는 일을 걱정하는 것. 셋째 자신이 성취할 수 없다는 이유로 불가능하다고 우기는 것. 넷째 별것 아닌 것에 끌리는 마음을 접지 않는 것. 다섯째 마음을 발전시키고 다듬기를 게을리하는 것. 여섯째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고 그에 따라 살도록 몰아붙이는 것.

▶고대 로마의 군인·정치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BC82~BC30·52세):카이사르의 사후 제2차 삼두정치(三頭政治)로 동방원정에 전념하여 여러 주를 장악하고 군사·경제적으로 막강한 세력을 쌓았으나 지도자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면서 삼두정치가 끝나자, 옥타비아누스가 독자적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전쟁을 선포했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와의 악티움해전에서 패하자 그의 아내 클레오파트라(이집트의 여왕)와 함께 이집트로 달아난 뒤 자살로 생을 마감했던 풍운의 인물이다. 자신의 임종을 지켜보고 있던 장교에게 황제가 남긴 마지막 한 마디는 ‘마음의 평화’였다.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BC63.9.23.~AD14.8.19.·77세): 본명은 가이우스이다. 옥타비아누스·레피두스·안토니우스와 삼두(三頭) 정치를 하다가,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를 격파하고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로마의 전권을 장악하고 제정 로마시대를 여는 초대 황제가 되어 세상에서 가장 존엄한 자를 뜻하는 아우구스투스로 불렸다. 아우구스투스 이후 로마는 200년간 계속 평화를 누리며 학술·문예를 장려하여 로마 문화의 황금시대를 이룩하였다. 변경의 수비도 견고하였고, 이민족의 침입도 없었으며, 국내의 치안도 확립되어 교통·물자의 교류도 활발하였고, 로마제국 내의 각지에서 도시가 번영하여 전 로마인이 평화를 구가했다. 이 시기를 ‘팍스로마나’라고 한다.

아우구스투스는 그가 죽기 전 그의 일가의 무덤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기원전 28년에 로마의 마르스 광장에 영묘를 지었는데 현재는 오랜 세월 동안의 풍화와 부주의함으로 인해 황폐화되었으나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2019년에 완료하여 개방하고 있다. 이 영묘는 아우구스투스가 기원전 31년에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후 처음으로 지은 건물들 중 하나이다. 건물은 원형으로 지어졌으며, 영묘의 바깥쪽에는 노송나무들을 심었다. 지붕의 한가운데에는 아우구스투스의 동상이 있었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오벨리스크가 쌍으로 입구에 세워졌다. 지금 이 오벨리스크들은 에스퀼리노 언덕과 퀴리날레 언덕에 각각 위치해 있다. 영묘가 완공되었을 당시 그 규모는 주변의 땅을 포함하여 지름 90미터, 높이 42미터인데 마르스 광장 북쪽 지역의 랜드마크이기도 하다. 그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내가 인생이라는 연극에서 내 배역을 잘 연기했더냐? 그랬다면 기쁜 목소리와 박수로 이 배우에게 찬사를 보내다오.” 황제다움이 느껴지는 유언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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