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나중에 알게 된 은행나무의 은혜!(1)
기고-나중에 알게 된 은행나무의 은혜!(1)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3.04.13 16:59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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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소/함양군 독림가(篤林家)
박동소/함양군 독림가(篤林家)-나중에 알게 된 은행나무의 은혜!(1)

여든 인생의 지극한 은행나무 사랑으로 국토녹화 50주년 행사에 대통령상을 수상하게 된 어떤 분의 삶을 소개하고자 한다.

1960년대 우리의 산야는 흙먼지 날리던 민둥산이었다. 비가 올 때면 흙탕물을 마구 쏟아내던 그 무렵 나는 고향에서 20대 청년 시절을 맞고 있었다. 당시 우리 농촌은 연료채취와 먹거리를 구하기 위해 온종일 종횡무진 산야를 누벼야 했다. 나 역시 숲과 나무를 가까이 하면서 먹거리를 찾아야 했는데, 어느새 풀과 나무의 종류를 구별하고 특성에 대한 식견도 깊어갔다. 이때 형성된 정서가 훗날 평생 숲과 나무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였다 싶다.

아버지를 따라 동네 사람들과 함께 지금의 복골댐 부근 임야에 오리목을 심었던 일이 내가 한 조림의 시작이었으며, 지금 고향 임야 일대에 내가 모르는 조림지는 거의 없다. 그때 심은 나무들이 어느새 자라 수원함양 기능을 다하면서 언제나 맑은 물을 가득 유지하는 복골댐이 되었다. 지금은 그곳 사람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생명의 젖줄이 되었으며, 또한 사람들이 많이 찾는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다.

50여 년 전 고향 신정리 마을 선산에 나는 밤나무를 처음 식재하여 당시 무주공산의 인식이 팽배하던 산림을 소득원으로서의 산림으로 바꿔야 한다고 강변하곤 했었다. 산업화 시대를 맞이하면서 도시화에 따른 농촌 이주의 물결은 나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20대 중반 일자리를 찾아 상경하여, 자동차부품공장에 입사해, 입사 5년 차에 철강공장 대표가 되어 승승장구하던 중에, 어느 날 나의 건강에 아주 큰 이상이 생겼다. 누군가의 신장을 이식받았다. 나이 많은 사람의 신장이라 의사는 5년 정도밖에 살 수 없다고 했다. 고마웠다. 신장 기증자를 몰랐기에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싶었다. 선택했다. 30여 년의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아내와 함께 낙향하여 고향 뒷산 600고지에 임야 33만㎡를 매입, 은행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전기도 수도도 없었다. 편의시설도 거의 갖추지 못한 허름한 주거지에 무작정 살기로 했다. 우편물 배달조차도 이곳까지는 할 수 없어 사서함을 이용해야 했다. 이곳에 벚꽃이 필 때 즈음이면 평지에서는 이미 벚꽃이 지는 600고지다. 평지에서의 비바람은 이곳에서는 예사 폭풍우가 되었으며, 잦은 폭설 때문에 생필품 조달에는 특별한 작전이 필요했다. 두릅, 취나물 등 산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가 음식에 이용되었고 물 역시 산에서 흘러내리는 것을 마셨다. 나무를 심을 수 있도록 지장목 정리와 작업로 개설부터 시작했는데, 오래 방치된 산림이라 시간과 돈이 생각보다 많이 들었다.

1996년도에 경기도 이천에서 20년생 은행나무 200주를 가져와서 식재를 시작했다. 바로 이듬해 경기도 파주에서 10년생 은행나무 3,000주를 가져와 농장에 심었다. 이 무렵 5년 전 세상을 떠난 당시 아내의 불만은 하늘에 닿을 정 였다. 거친 작업 여건은 끈기와 용기로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하지만, 5년여 정도밖에 살 수 없다는 시한부 삶의 선고는 늘 따라다니는 두려움이었다. 그래서 방심은 절대금물이었다. 하지만 나무 심는 일은 결코 중단하지 않았다. 연이어 1998년에는 충남 금산에서 2,000주, 경북 상주에서 2,000주를 가져와 계속 심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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