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12)
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12)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3.04.17 16:56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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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12)

▶로마의 제3대 황제 칼리굴라(12.8.31.~41.1.24.·29세):본래 이름은 가이우스이며, 칼리굴라는 이름이 아니라 자기의 아버지가 지휘하고 있었던 게르마니아 군단 병사들이 귀여워하며 붙여준 ‘꼬마 장화’라는 뜻을 가진 별명이며, 본명은 가이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이다. 재위 기간은 겨우 3년 1개월여인 37년 3월 16일~41년 1월 24일까지다. 이탈리아 로마 팔라티노 언덕 내 궁전과 극장 사이 통로에서 암살당했는데 그가 암살된 궁전은 현재 폐허가 되어 남아있다. 암살 과정은 다음과 같았다. 가이우스가 죽던 41년 1월 24일 정오가 지날 무렵, 가이우스는 극장 안에 있었다. 이때 그는 점심을 먹을지 말지 망설이고 있었는데 전날 저녁식사를 과식한 결과 속이 거북했다고 한다. 그러나 친구들의 설득에 어쩔 수 없이 점심을 먹으러 갔다. 이때 가이우스는 거리에서 귀족 남자아이들이 트로이 전쟁 춤을 연습하고 있자, 잠시 멈춰 서서 이들을 격려하고 이들을 극장으로 데리고 가서 연습을 도와주고 공연을 시켜주려고 했다. 그러나 이때 친구 중 한 명이 감기에 걸렸는데 얼른 가자고 불평해서 가야만 했다.

그 뒤, 이야기에 대해서는 2가지가 전해오는데, 첫 번째 이야기에 따르면 칼리굴라가 서서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근위대장 카시우스 카이레아가 뒤쪽에서 갑자기 나타나 "이걸 받아라." 하고는 목 깊숙이 칼을 꽂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코르넬리우스 사비누스라는 장교가 칼리굴라의 가슴을 찔렀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야기는 장교 사비누스가 먼저 부하를 시켜 군중들을 쫓아냈고, 그런 다음 사비누스는 황궁 통로에서 칼리굴라에게 그날의 암호가 무엇인지를 물었다. 이때 칼리굴라는 웃으며 “유피테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뒤에서 경호를 하고 있던 카이레아가 “그래, 그렇다고 해주지.”라고 외치며 고개를 돌린 칼리굴라의 턱을 칼로 베며 공격했다. 이에 칼리굴라는 몸부림을 치며 바닥에 쓰러져 게르만 근위병들을 큰 소리로 부르며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자 카이레아는 가담자들에게 “다시 내려쳐!”라고 명령을 내려 상처를 입은 채 저항하는 칼리굴라에게 30군데의 상처를 입히며 칼로 찔러 죽였다. 이때 황제의 가마꾼들이 장대를 들고 칼리굴라를 지키기 위해 저항했고, 그 사이 칼리굴라의 외침을 들은 게르만 근위병들이 “황제를 보호하라!”를 외치며 암살자 몇 명과 그 자리에 있다는 이유로 죄 없는 원로원 의원 몇 명을 죽였다고 한다. 믿을 수 없고, 거짓과 과장이 가득한 수에토니우스 버전과 달리 동시대 사람 필로의 조카인 요세푸스, 수에토니우스의 것을 참조함에도 다른 이들의 기록도 살펴 적은 디오 카시우스가 전한 칼리굴라 암살은 야사 같은 이야기와는 그 결이 많이 다르다.

이들 역시 모두 칼리굴라를 수에토니우스처럼 가이우스로 적고 있는데, 이들의 공통된 의견에 따르면 가이우스 암살은 평범한 상황에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던 국가 원수 시해 사건으로 발생부터 결과까지 급박하게 전개됐다고 한다. 또 카이레아·루푸스·사비누스 등 20명 중 카이레아는 가이우스에게 업무적인 문제, 개인 성격상의 미묘한 대립, 젊은 황제의 인격적 비난과 질책 등으로 사적 원한이 깊어 이 암살은 그 배후가 누구였는지 간에, 급변사태가 벌어진 것은 놀라운 일이면서도 예상된 것이었다고 한다. 이들의 기록에 따르면, 가이우스가 아이깁투스의 알렉산드리아로 수도를 옮길 것이라는 발표를 할 것이라는 소문이 반대파들 사이에서 나오던 무렵에 황제가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서기 41년 1월 24일, 가이우스는 평소처럼 황제 업무 중 하나인 공공 건축물 보수, 관리 업무를 살펴보고 국가 행사 준비를 확인코자 황숙 클라우디우스·멘토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 등과 극장에 들렸다가 황궁 내 지하통로에서 암살됐는데, 이때 황제의 동선을 알고 있던 이는 부정부패 혐의가 보고된 황실 관료들에게 정보를 받은 카이레아 등 암살범 20명 남짓과 황제의 멘토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였다고 한다. 이때 칼리굴라는 20명 남짓 암살범들에게 시해됐는데, 황제와 함께 있던 황숙 클라우디우스는 황궁 내 지하통로에서 황제가 암살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자마자, 죽기 살기로 탈출해 황궁 안에서 가장 비밀스럽고 찾기 어려운 방으로 몸을 피신했다. 29세의 젊은 황제는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나는 아직 살아있다”. 29세 젊은 황제… 그는 아직도 역사 속에 살아 있는 황제인도 모른다. 29세 얼마나 살고 싶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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