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우담의 시가 흐르는 길-누구를 위한 길인가
박우담의 시가 흐르는 길-누구를 위한 길인가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3.04.30 15:42
  • 14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우담/한국디카시학 주간·시인
박우담/한국디카시학 주간·시인-누구를 위한 길인가

네모난 그대의 옷을 펼치면
고운 나뭇결의 향기가 코에 스치고
두 손에 안겨 조용히 넘겨지네

덮으면 하나
펼치면 둘
시집은 가지런히 가랑이를 벌리네

대지의 나무들이 내 마음을 훔쳐다가
비단 나뭇결의 향기에 숨기네
책장 속에 숨은 내 마음은
넘길수록 조금씩 열리네

그대의 옷을 만지면
아픈 팔이 아픈 글이 아픈 사랑이 사라지고

덮으면 하나
펼치면 인생
다시 그대의 옷을 벗기면
내 마음은 그대의 것
왼쪽으로 다 넘기면 그대에게 갈 수 있네

(최희강의 '책장')

사과꽃이 피어 있는 길을 따라 남강이 서로 다른 언어로 흐르고 있다. 진주에서 ‘2023진주아시아역도선수권대회’가 역대 최대 규모로 개최된다. 주중에 아시아의 역사들이 진주실내체육관으로 모여들어 ‘몸시’를 쓰고 기록을 쓴다. 이번 대회는 36개국 600여 명이 참가한다.

오늘 소개할 작품은 최희강 시인의 ‘책장’이다. 최희강은 격월간 <시사사>로 등단했다. 간호사로 근무하면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5월의 남강은 드맑고 힘이 넘쳐 보인다. ‘대지의 나무들이’ 생기를 뽐내는 연두의 계절이다. 요즘 챗GPT 등 인공지능 시대지만 도서관에 가서 자신과 잘 맞는 시집을 펼치면 얼마나 감동이 있겠는가. 진주에는 연암도서관, 서부도서관 등 권역별 도서관이 있거나 건립 예정이어서 시민들이 이용하기 편리하다. 남부도서관 계획 소식이 들리지 않아 아쉬울 따름이다.

‘책장’ 넘기는 맛을 ‘두 손’으로 느낄 수 있다. 시집은 처음엔 ‘네모난’ 모습이지만, 점차 시 맛보기에 빠져들면 시집은 유연해진다. 점점 긴장되기 시작한다. 작품 ‘책장’은 시집을 읽다가 열대우림의 ‘나무’를 생각하는 최희강 시인의 시적 사유를 엿볼 수 있다.

화자는 시집을 넘기면서 어떤 시가 담겨 있을까 궁금해진다. 목차를 보면서 시인의 말을 읽고 앞에서부터 끝장까지 훑어본다. 그러다가 시를 한 줄 한 줄 읽으면서 행간까지 음미하려고 노력한다. 화자는 책장을 넘기면서 인도네시아 어느 지역에서 베어진 목재를 떠올린다. 그러다가 노동자들의 고뇌와 슬픔을 공유한다.

‘고운 나뭇결의 향기가 코에 스치고’ 낯선 표현과 비유에 자꾸 시집 속으로 빠져든다. 바다를 건너온 ‘나무’들이 때론 화자의 ‘마음’을 빼앗고 때론 ‘비단 나뭇결의 향기에 숨’는다. 문장 너머의 그림자를 찾으러 ‘네모난 그대의 옷을 펼치면’ 행간에 숨은 ‘아픈 글이 아픈 사랑이 느껴’진다. 이따금 오독하지만 그래도 ‘내 마음은/넘길수록 조금씩 열리네’라고 말하고 있다.

시인은 내면의 형체를 내시경처럼 알아내어 표현해야 한다. ‘두 손에 안겨 조용히 넘겨지네’라고 말한다. 이는 편하게 시를 나름대로 읽었으면 하고, 평소 책을 읽고 싶을 때 꺼내듯이 인생도 자연스럽게 흘러갔으면 하는 바람이라 하겠다. ‘시집은 가지런히 가랑이를 벌리’는데, 사과 꽃잎의 책갈피가 생각난다.

요즘 인쇄물이 넘쳐난다. 지금도 숲에서 나무는 베어지고 길 잃은 책들이 쏟아진다. 얇은 종이지만 몇 장 겹치면 제법 근육질처럼 단단해진다. ‘책장’이 뻔한 소리 하는 작품이나 짝퉁 시인의 정수리를 내리칠 것이다. 최소한 AI가 정착되면 연구하지 않는 학자나 창조적 노력을 하지 않는 문화예술인은 자리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AI와 잘 놀기 위해서 사용자는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공부가 더 필요한 시대가 온다. 인간의 피드백을 지속해서 학습하고 예측의 정확도를 높여도, 챗GPT가 인간의 무의식을 현실로 끄집어내지 못할 것이다.

‘책장’에 ‘인생’이 있고 길이 있다. ‘2023진주아시아역도선수권대회’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길 기대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