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15)
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15)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3.05.15 16:18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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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15)

▶로마 황제 자리의 세습제를 시작한 황제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AD146.4.11~AD211.2.4·65세, 재임:AD193~AD211·18년): “서로 사이좋게 지내라. 군인들을 부유하게 해주고 다른 모든 사람은 무시해라” 아들 카라칼라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주면서 남긴 유언이다. 권력의 특징이 잘 표현된 유언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 로마 황제 자리를 형과 같이 세습하였으나 형의 부하에게 암살당한 황제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AD189.3.7~AD211.12.26·22세, 재위:AD209~AD211·2년):“나는 모든 것을 했다. 원로원 의원도 했고 변호사도 했다. 집정관도 했고 대대장도 했다. 장군도 했다. 그리고 황제도 했다. 국가 요직은 모두 거쳤고, 임무를 충실히 했다고 자부한다. 허나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그 모두가 헛된 것 같다.” 20세 때에 형인 카라칼라와 공동 황제가 되었으나, 재위 2년 만인 22세 때 형 카라칼라의 부하에게 암살당했다. 황제 자리의 세습제를 처음 시작한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아들이다. 권력 무상과 인생의 허무를 깨달은 것 같다.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 초대 황제 조조(曹操:AD155~AD220·65세, 재위:AD216~AD220·4년):“죽음은 서늘한 여름과 같다. 과거에도 사람들이 나를 오해했고, 현재도 사람들이 나를 잘못 알고 있고, 미래에도 사람들이 아마 나를 잘못 알고 있겠지만, 나는 그것이 두렵지 않다.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않았는데, 옛 장례 규정을 모두 따를 수 없다. 염습(殮襲) 때 평상복을 사용하고, 금·옥이나 진귀한 보물을 넣지 마라. 묘는 72기를 만들어 달라.” AD220년 정월 낙양(洛陽)에 도착한 조조는 오(吳)나라 손권(孫權)이 충성의 표시로 보낸 관우(關羽)의 머리를 받은 직후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유언이다. ‘삼국지(三國志)’의 저자 진수(陳壽:AD233~AD297)는 ‘시대를 초월한 난세의 영웅’이라고 평을 했다.

아들 문제(文帝) 조비(曹丕)에 의해 지금의 하북성(河北城) 임장현(臨漳縣) 서남쪽 업진(業鎭) 부근에 묻혔는데 그의 무덤은 아무것도 없다고 알려져 도굴(盜掘)되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고 한다. 묘를 72기나 만들어 달라고 한 뜻은 살아생전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사람들이 세상이 바뀌면서 자신의 묘가 훼손되는 것을 염려하여 한 유언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2018년 3월 26일 ‘베이징청년보’에 따르면 허난성 문화재고고연구원은 허난성 안양현 안펑[安豊]향 시가오쉐(西高穴)촌에 위치한 동한(東漢)시대 무덤군에서 조조와 조조 부인 2명의 무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허난성은 지난 2009년 12월 이 지역 무덤군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조조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고릉(高陵)을 발견, 연구 분석 작업을 진행해왔다. 발굴팀은 고릉 주변의 분토 기반, 천도통로, 동부 및 남부 건축물 등을 포함한 주요 구조를 밝혀내고 조조와 맏아들 조앙(曹昻)의 모친 류(劉)씨, 조비(曹丕), 조식(曹植)의 모친 변(卞)씨가 매장돼 있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묘원 안에서는 모두 남성 1명, 여성 2명 등 3구의 유해가 발견됐는데 이중 남성 유해는 비교적 완전한 형태로 60세 전후의 나이에 숨진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팀은 무덤 구조와 소장품, 역사 기록 등을 분석해 이 남성이 조조라고 결론을 내렸다.

삼국지 위서에 조조의 정실부인 변씨가 70세 전후에 숨진 뒤 조조 묘에 합장됐다는 기록에 따라 여성 노인 유해는 변씨인 것으로, 젊은 여성 유해는 일찍 숨졌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첫째 부인 류씨인 것으로 추정됐다. ‘삼국지’ 위서(魏書)의 무제기(武帝紀)에는 건안 23년(AD218년) 노년기의 조조가 자신의 장지로 메마른 고지대를 골라 분봉을 하지 말고, 나무도 심지 말며 장례를 검소하게 치르라는 영을 내렸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발굴단장 판웨이빈(潘偉斌) 연구원은 아들 조비가 부친의 유지를 지키지 않고 성대한 장례를 치렀으나 후대에 도굴되는 것을 우려해 묘지 부근에 세웠던 건축물을 철거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당시 장례 규격으로 보면 황제 1급에 해당하는 장례였다. ‘삼국지’에서 유비, 손권에 맞선 간웅(奸雄)으로 그려진 조조는 후한(後漢) 조정을 장악해 제도를 정비하고 인재를 등용해 세력을 크게 확대했으며 스스로 위왕으로 봉하면서 황제와 마찬가지의 권력과 위세를 행사했다. 조조 무덤이 맞다는 중국 당국의 결론에도 진위 논란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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