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19)
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19)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3.06.19 16:09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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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19)

▶신라 50대 정강왕(定康王:?~887·재위:886~887·1년):성은 김(金), 이름은 황(晃)이며 시호는 정강(定康)이다. 신라의 제48대 경문왕(景文王·재위 861~875)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제47대 헌안왕(憲安王·재위 857~861)의 딸인 문의왕후(文懿王后)이다. 제49대 헌강왕(憲康王·재위 875~886) 김정(金晸)의 동생이며 제51대 진성여왕(眞聖女王·재위 887~897) 김만(金曼)의 오빠이다. 886년(헌강왕 12) 음력 7월 5일에 형인 헌강왕이 적자(嫡子)가 없이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정강왕은 887년 음력 5월 병이 들자 뒤를 이을 자식이 없으니 누이동생인 김만에게 “여동생(뒤의 진성여왕)의 천성이 명민(明敏)하고 체격이 남자 같으니 왕위를 잇게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정강왕이 죽은 뒤 누이동생인 김만이 제51대 진성여왕으로 왕위를 이었다. 무덤은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산53번지에 있는데 1969년 8월 27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86호로 지정되었다.

▶후 고구려를 건국하였던 궁예(弓裔:869?~918·49세? 재위:901~918·17년):궁예가 애꾸눈이 된 사연=신라 47대 임금 헌안왕은 슬하에 공주를 둘 두었을 뿐 대(代)를 이을 왕자를 두지 못해 근심하고 있던 중에 후궁에게서 왕자를 얻게 되었는데 왕자가 태어날 때 하늘에서 상서로운 빛이 집안 전체를 감쌌으며, 하얀 이(齒)가 가지런히 나 있었다고 한다. 왕은 이름을 궁예(弓裔)라고 지었다. 그런데 일관(日官)에게 왕자의 사주를 물었는데… ‘단오 날에 태어난 아기는 천명을 거스르며, 아기가 태어날 때 하늘에서 상서로운 빛이 비친 것은 천기를 범하는 일이며 태어날 때 이가 나 있음은 장차 국운을 크게 해칠 나쁜 징조’라고 풀이했다.

왕은 고심을 거듭하다가 태어난 왕자를 죽이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핏줄에 연연하기보다는 사직을 지키고 보존하기로 결심하여 내관(內官)을 불렀다. “지금 당장 궐 밖으로 나가 오늘 태어난 왕자를 없애도록 하라. 이는 아무도 모르게 비밀리에 시행해야 한다. 왕자를 죽이지 못하면 네가 죽을 줄 알라.” 내관은 궁궐 밖의 후궁 집에 찾아갔다. “어명을 받고 왔습니다. 일관의 말에 의하면 궁예 왕자님은 국운을 해칠 불길한 운명을 타고 나셨기에 없애라고 하셨습니다.” 아이를 빼앗은 내관은 강보에 싸인 아기를 다락 아래로 던져버렸는데 다락 아래에 숨어 있던 유모가 두 팔을 벌려 떨어지는 아기를 받았는데 그때 유모의 손가락이 아기의 한쪽 눈을 찌르고 말았다. 유모가 아기를 안고 산으로 도망을 쳐 아기를 살렸는데 왕자는 애꾸눈으로 평생을 살게 되었다.

신라 왕실의 서자로 왕위계승권에서 밀려난 뒤 세달사로 피신하여 승려가 됐다. 신라 말기의 혼란기에 자립하여 사병을 모으고 장군이 되었다가 스스로 왕을 칭하고 후고구려를 건국하였다. 뒤에 국호를 마진(摩震), 연호를 무태(武泰)로 하다가 후에는 국호를 태봉(泰封), 연호를 수덕만세로 변경하였으나, 스스로를 미륵으로 자처하면서 전제왕권을 강력히 추진하게 되었다. 자신의 두 아들도 ‘청광보살’과 ‘신광보살’로 부르게 했다. 궐 밖으로 행차할 때는 머리와 꼬리를 금실과 비단으로 장식한 백마를 타고 일산(日傘)과 향화(香花)를 받든 동남(童男) 동녀(童女)를 앞세운 다음 자신의 행차 뒤로는 2백 명의 비구승들이 염불을 하며 따르게 했다.

또한 스스로 20여 권의 경전을 지어 신하들로 하여금 봉송케 하고 자신은 그 경전을 가지고 설법을 하기도 했다. 이를 보다 못한 당대의 고승인 석총이 궁예에게 진언하였다. “폐하! 폐하께서 지으신 경전은 황당한 얘기와 괴담에 지나지 않으며 논하시는 설법은 근거 없는 억설에 불과하오니 이제 그만…” 궁예는 석총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철퇴로 머리를 내리쳐 그 자리에서 죽여 버렸다. “괘씸한 중놈 같으니라고! 감히 살아 있는 생불을 두고 죽은 부처를 들먹이다니!” 궁예의 포악함은 갈수록 더해 광기로 변해 갔다.

이로 인하여 왕건을 강력히 지지한 옛 고구려계의 패서 지역 호족들에 의해 축출되어 강원도 평강의 들판에서 쌓아 둔 보리 이삭을 훔쳐 먹다가 주인에게 들켜 심한 매질을 당한 끝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면서 “드디어 하늘이 나를 버렸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속세 성은 김(金)씨, 본관 경주(慶州), 법명은 선종(善宗)이다. 918년 왕건에게 축출되었으므로 시호(諡號)는 없다. 강원도 철원군에서는 ‘군민의 날’인 매년 10월 10일부터 12일까지 3일간 ‘태봉, 천년의 기(氣)를 펼쳐라’를 주제로 철원공설운동장 무대에서 궁예왕의 은덕을 기리는 ‘태봉(泰封)제례’가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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