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 독립운동가 백초월(白初月) 스님
진주성- 독립운동가 백초월(白初月) 스님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3.06.25 15:56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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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봉 대종사
동봉 대종사/진주 여래사 주지·전 진주사암연합회 회장- 독립운동가 백초월(白初月) 스님

고성 옥천사가 고성군청과 함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헌신한 백초월(白初月, 1878년~ 1944년) 스님을 비롯한 옥천사 스님들의 항일 행적을 심층적으로 발굴하여 조명한다는 소식이다. 옥천사는 오는 6월 29일 백초월 스님의 순국 79주년 추모 다례재를 봉행한다. 옥천사는 백초월 스님의 업적과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며 후대에 남겨 미래세대에 계승하기 위해 추모 다례재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백초월 스님은 일제강점기의 승려이자 독립운동가로 일제에 항거해 맹렬한 독립운동을 펼친 불교계의 거성이지만 만해 한용운 스님이나 백용성 스님만큼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백초월 스님은 1919년 3·1운동 당시 불교계를 이끌던 한용운, 백용성 스님이 체포되자, 두 분의 뒤를 이어서 대한승려연합회 선언서를 발표하고 의용승군제를 추진한 인물이다.

초월 스님은 1916년 명진학교 교장을 지냈으며, 3·1운동 직후인 1919년 7월 항일신문인 ‘혁신공보’를 발간하고 사장으로 활약하며 신문을 상해임시정부 및 길림성의 독립군에 보냈다. 또한, 상해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천은사·화엄사 등 각처의 사찰을 통해 군자금을 모금하고 국내의 애국청년들을 뽑아 길림성의 독립군 및 상해임시정부로 파견하기도 했다.

초월 스님은 상해임시정부 명의로 채권을 발행할 것을 계획하였는데 1920년 3월 동경에서 체포돼 경성지방법원으로 이송되었다. 이때 모진 고문으로 건강이 악화된 뒤부터 미치광이로 행세하며 활동하다 여러 차례 경찰서 유치장에 갇히기도 했으나 그때마다 정신이상자로 석방되었다고 한다.

1939년 백초월 스님이 거처하던 마포포교소 신도가 만주로 탈출하던 중 봉천행 화물열차에서 ‘대한독립만세’라고 낙서한 사건에 연루되어 일본 경찰에 잡혔다. 그 뒤 마포·대전 형무소를 거쳐 청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옥사하였다. 초월스님은 청주 금천동 형무소 공동묘지에 묻혔다가 6·25전쟁 때 유해가 없어지는 사후의 비극을 겪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스님의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해 1986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을 추서했다.

이처럼 초월 스님은 국내외를 망라하는 독립운동을 추진했으며, 상해 임시정부를 배경으로 활동하면서 3.1운동 직후 불교계 독립운동의 중심에 있었지만 일반 대중에게는 잊혀진 인물이 되었다. 옥천사가 초월 스님의 독립운동을 재조명하고 나선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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