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20)
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20)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3.06.26 15:58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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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20)

▶신라 47대 헌안왕(憲安王:?~861.재위:857~860·3년):성은 김(金)이고 이름은 의정(誼靖)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아버지는 김균정(金均貞:후에 성덕왕으로 추봉)이고, 어머니는 조명부인(照明夫人)이다. 860년 9월, 군신과의 연회 시에 왕족 김응렴(金膺廉:훗날 신라 제48대 경문왕)을 등용하여, 장녀를 시집보냈다. 3개월 후, 재위 5년째의 861년 1월에 병으로 쓰러지고 뒤를 잇게 하는 남자가 없었기 때문에 1월 23일에 사위 김응렴에게 왕위를 선위하면서 “과인(寡人)은 불행히도 아들은 없고 딸만 있다. 우리나라 고사(古事)에 비록 선덕(善德)과 진덕(眞德)의 두 여왕이 있었지만, 이는 부인이 외사(外思)에 참여하는 것이 본받을 일이 아니다. 사위 응렴(膺廉)은 나이 비록 적으나 효성이 지극하고 덕이 있으니 이를 세워 섬기면 반드시 국치(國恥)에 부족함이 없으리니 과인은 죽어도 썩지 않겠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1월 29일에 사망했다. 무덤은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데 1969년 8월 27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79호 ‘신라헌안왕릉’으로 지정되었다가, 2011년 7월 28일 ‘경주 헌안왕릉’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9세기 초·중반에 스웨덴과 덴마크를 다스렸다고 하는 전설상의 바이킹 군주 라그나르 로드브로크(?~864?):문서 기록을 남긴 것이 없었던 북유럽의 초기 역사가 그러하듯이, 그 역시 사료가 부족하고 불분명해 전설의 영역에 남아 있는 인물이다. 오늘날 바이킹 이미지의 원조 격인 인물이다. 전투에서 패하고 붙잡혀 맨몸으로 독사들이 득실거리는 굴에 처넣어져 생을 마감하면서 “늙은 멧돼지가 비참히 죽어가는 것을 안다면 새끼 멧돼지들이 어떻게 꿀꿀거릴까”라는 유언을 남겼다. 과연 바이킹 군주다운 명 유언이라고 생각된다. 새끼 멧돼지들이란 그의 아들들을 뜻한 것이었다.

▶코르도바의 위대한 회교(回敎)왕으로써 난세(亂世)를 평정한 명군(名君)이었던 아프가니스탄의 아브 델 라만 Ⅲ세(891~961 ‧ 70세)는 코르도바의 후우마이야 왕가에서 태어났다. 961년 코르도바 궁전에서 숨을 거두면서 “신하들의 사랑, 적의 두려움, 그리고 동맹국의 존경을 받으면서 승리와 평화로운 가운데서 50여 년을 다스려 왔노라. 부(富)와 명예(名譽), 권력과 환락은 나의 부름을 기다렸고, 나를 위하지 않고는 이 세상에 어떠한 축복도 있을 수 없었느니라. 이와 같은 자리에서 나의 운명에 빠져드는 턱이 없고 알찬 행복의 나날을 나는 열심히 헤아려 왔노라. 오! 사람들이여! 그대들의 믿음을 현세에 두지 말지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가 죽기 전 남겼던 쪽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내가 진정으로 행복을 느꼈던 날이 과연 며칠이나 되었는지 헤아려보니… 겨우 14일이었다. 그러니 세상사에 너무 큰 기대를 걸지 말지어다.’ 왕권을 강화하고 개편하여 후우마이야 왕조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이슬람 왕조가 이베리아 반도를 오랫동안 통치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사람의 영향이 크다.

▶중국 송(宋)왕조를 세워 문치주의(文治主義) 터전을 마련하고 사치와 방종을 멀리한 창업 황제 조광윤(趙匡胤:927~976·49세. 재위:960~976·16년):중국 하남성 공의시 경내 서촌진·지저진·회곽진 일대 약 30㎢ 구역에 금의 포로가 되었던 휘종과 흠종을 제외한 송대(宋代) 7명의 황제와 송태조(宋太祖)의 부친 및 종실과 더불어 구준(寇準:961~1023)·포증(包拯:999~1062) 등 저명한 대신이 안장된 능묘(陵墓)군으로 1982년 고묘장(古墓葬)으로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에 지정되었다. ‘금궤지맹(金櫃之盟)→맹서를 새겨 후대에 전한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중국 역사상 크게 부각되지는 않았지만 제왕의 덕을 갖춘 황제가 바로 송나라를 세운 조광윤이다. 그는 끝까지 자기 단속을 게을리하지 않으면서 검소한 생활을 견지했다. 그가 남긴 맹서는 중국 역사는 물론 세계사적으로도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첫째, 후주 왕조의 시씨 자손을 죽이지 않고 보전하며 죄가 있어도 벌을 주지 않는다. 둘째, 나라를 위해 글을 올리는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셋째, 농민들의 세금을 올리지 않는다. 조광윤은 비석에 맹서문을 새겨 태묘(太廟) 안에 모셔놓았다. 황제의 허락 없이는 들어갈 수도 없었다. 다만 새로이 황제가 즉위하면 반드시 태묘에 들어가 이 비석을 읽어야 했다. 이때 황제를 수행하는 사람은 글을 전혀 모르는 일자무식의 환관(宦官) 한 사람뿐이었다. 맹서문의 마지막은 ‘이 맹서를 어길 때는 반드시 천벌을 받을 것이다’로 끝난다. 황제의 직업은 화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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