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21)
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21)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3.07.03 16:09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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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21)

▶고려 초대 황제 태조 왕건(王建)(877.1.4~943.5.29·66세, 재위:918~943·25년):후삼국 시대를 통일하여, 한반도의 재통일을 이룩하여 분열과 혼란의 시기에 탁월한 정치적 식견으로 나라를 세우고, 통일 전쟁을 수행하였다.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은 66세에 세상을 떠나면서 “인생이란 원래 덧없는 것이었다(浮生自古然矣:부생자고연의)”라는 유언을 남겼다. 도읍 개경의 서쪽 송악산 남쪽 기슭에 묻혔다. ‘고려사’에는 943년 6월에 장사를 지내었고 능 이름을 현릉(顯陵)이라 하였다. 불교의 서방정토(西方淨土)를 염원한 듯 왕건의 능은 생전에 머물렀던 궁궐의 정서 쪽에 자리했다. 능호인 현(顯)은 한자에서 ‘나타나다’란 뜻이고 더 나가서는 ‘명성이 내외로 떨쳐지다’란 뜻이다. 혼란스러웠던 후삼국시대에 수많은 호족들을 제압한 뒤 결국 후백제와 신라를 흡수하고 발해의 유민까지 받아들여 고려에서 시작하여 조선으로 이어지는 한반도 통일왕조 시대를 연 태조에게 걸맞은 능호이지만 살아서 부귀와 영화가 덧없음을 보여주고 간 유언이 아닌가 한다. 무덤은 북한 개성특별시 해선리에 있는데 아내 신혜왕후 유씨의 합장(合葬) 릉(陵)으로 북한의 국보 제179호이며 유네스코 세계유산 개성역사유적지구에 포함되어 있다.

왕건이 역사가들로부터 존경받는 이유는 고려를 건국한 후, 후삼국을 통일하고 발해 유민을 수용하여 민족의 완전한 통합을 꾀했다. 고려는 후삼국을 비롯하여 발해의 고구려계 유민까지 포함한 민족의 재통일을 완성하였다. 고려의 후삼국 통일은 외세의 도움 없이 민족의 재통일을 이루었다는 데 역사적 의의가 있다.

▶고려 제6대 왕 성종(成宗:961.1.15~997.11.29·36세, 재위:981~997·16년):휘는 치(治)·자는 온고(溫古). 5대 왕 경종(景宗·재위:975~981) 사후 어린 조카 송을 대신하여 왕위를 계승하였다. 재위 중 국자감을 정비하여 관학을 발전시키고 새로운 인재를 양성했고, 지방에는 경학박사와 의학박사를 파견하고 향학을 설치하여 유학 교육을 실시하였다. 유교적 정책을 추진하였으며, 거란족의 거듭된 침입이 있자 장군 서희(徐熙:942~998)를 파견하여 담판을 짓고, 이후 거란족의 침입이 재개되자 격퇴하여 강동 6주를 얻어냈다. 죽기 직전 대사면령을 내리자는 신하 왕융의 상소에 “사람의 생은 하늘에 달렸으니 어찌 죄 있는 자를 용서하여 연명하려 하겠느냐. 또한 내가 대사면령을 내리고 죽으면 나를 계승할 자가 무엇으로 새로운 왕의 은혜를 베풀겠느냐?”라는 유언을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었다. 무덤은 황해북도 판문군 진봉리 서쪽 강릉골에 있다. 표지석에는 ‘高麗 成宗’이라고 쓰여 있다. 묘호는 성종(成宗)이며 시호(諡號)는 강위장헌광효헌명양정문의대왕(康威章憲廣孝獻明襄定文懿大王)이고 능호(陵號)는 강릉(康陵)이다. 개간된 논밭에 둘러싸여 민묘(民墓)처럼 초라한 모양새로 돌보는 이 없이 남아 세월을 무상함을 대변해주고 있다.

▶고려 제16대 왕 예종(睿宗:1079.2.11~1122.5.15·43세·재위:1105~1122·17년):휘는 우(俁), 자는 세민(世民). 1120년 음력 10월, 팔관회(八關會) 때 예종이 가면극을 보고 지은 노래인 ‘도이장가(悼二將歌)’는 태조 왕건을 도운 공신이자 927년 후백제와의 공산성 전투 중 전사한 신숭겸(申崇謙:?~927)과 김낙(金樂:?~927년) 두 장군(二將)을 추도(追悼)하는 노래(歌)이다. 향찰(鄕札)로 표기된 향가(鄕歌)이며 현존하는 향가 중 유일하게 왕이 지은 노래이다. ‘도이장가(悼二將歌)’=主乙完乎白乎 心聞際天乙及昆(님을 온전케하온 마음은 하늘 끝까지 미치니)/魂是去賜矣中 三烏賜敎職麻又欲(넋은 가셨지만 내려주신 벼슬 또한 대단하구나)/望彌阿里刺 及彼可二功臣良(바라보면 알리라 그때의 두 공신이여)/久乃直隱 跡烏隱現乎賜丁(오래되었지만 거룩한 그 자취는 나타나시도다). -예종 지음, 현대어 번역 양주동(梁柱東:1903~1977).

“내 병이 크게 더하여 형세가 다시 낫지 못하겠다. 이에 중한 소임을 너에게 전하여 준다. 내가 지금 생각하니 평생에 행한 일이 잘한 것은 적고 잘못한 것은 많다. 나를 본받지 말고 다만 옛날 성현의 도를 생각하고 우리 태조의 교훈을 받들어 지위에서 게으르지 말고 길이 백성을 복되게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무덤은 개성시 오산리에 있는데 묘호는 예종(睿宗), 시호는 명렬제순문효대왕(明烈齊順文孝大王), 능호는 유릉(裕陵)이다. 능비(陵碑)는 사라져 받침돌만 남아 있고 봉분(封墳)주위의 석물(石物)들은 거의 다 사라져 쓸쓸함을 더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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