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22)
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22)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3.07.10 16:07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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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22)

▶세계를 호령한 정복자·몽골제국의 칭기즈 칸:1162~1227·65세·재위:1206~1227·21년):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사 전략가이자 정복자로 칭송받는 역사상 가장 커다란 왕국 몽골 제국을 지배했는데, 왕국의 규모는 중국과 태평양 해안으로부터 인도와 동양의 여러 나라를 포함하여 서유럽까지 이르렀다. 그는 알렉산더 대왕·나폴레옹·히틀러 셋이 정복한 땅보다도 넓은 땅을 점령했다. 그는 로마가 400년 걸려 정복한 땅을 고작 인구 100만과 전사 10만으로 태평양에서 지중해까지 동서 8천km에 이르는 유라시아 제국을 25년 만에 정복하고 중국·이슬람·유럽 등 2억 인구를 150년간 통치했다.

사냥을 하던 중 말에서 떨어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사조영웅전’에는 원태조(元太祖) 칭기즈 칸이 임종하기 전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원태조는 아무리 좋은 약이나 훌륭한 의술로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금국(金國)이 공물로 바친 옥쟁반과 명주(明珠)를 내동댕이치며 울부짖었다고 한다. “내 목숨을 하루도 연장시켜 주지 못하거늘 이딴 명주 수천 알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성(城)을 쌓지 마라.”라고 체념하고 그의 거친 생애와는 대조적으로 매우 부드럽고 평온하게 마지막 순간을 맞았다.

칭기즈 칸이라는 칭호는 ‘진정한 세계 군주’ 또는 ‘바다와 같은 지배자’라는 의미로 그의 위상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이 벌린 전쟁으로 3~5백만 명이 희생되었다. 그는 위와 같은 유언을 남겼는데 대초원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그의 무덤은 끝없는 연구와 탐사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그 위치가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는 자신이 ‘해가 뜨는 곳부터 해가 지는 곳까지 지배하라’는 하늘의 계시를 받았다고 믿었고 자신의 신념을 끊임없이 확산시켰다.

유목민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 중 하나가 정착이다. 정착은 혁신의 멈춤을 의미하는 것이고,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공룡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누구보다 정착을 경계해야 함을 잘 알았던 칭기즈 칸은 “내 자손들이 비단옷을 입고 벽돌집에 사는 날, 내 제국은 망할 것이다.”라며 ‘성(城)을 쌓지 마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이는 넓은 세상을 보지 못하고 스스로의 한계에 갇히게 됨을 경계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유언을 귀담아 듣지 않은 후세인들은 유목민의 정신을 버리고 궁궐을 짓고 그 속에서 정권 싸움을 벌이게 되었고, 결국 그것이 몽골 제국(원나라)이 망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는 아홉 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독살당한 후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지독한 가난과 고생스런 생활 속에서 성장했지만 그런 환경은 오히려 그를 강하게 단련시켰다. ‘칭기즈 칸의 고백’이란 글은 인간 칭기즈 칸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명문 중 명문이다.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나는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고 마을에서 쫓겨났다./가난하다고 말하지 말라./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고/목숨을 건 전쟁이 내 직업이고 내 일이었다./작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말하지 말라./그림자 말고는 친구도 없고 병사로만 10만,/백성은 어린애, 노인까지 합쳐 200만도 되지 않았다./배운 게 없다고, 힘이 없다고 탓하지 말라./나는 내 이름도 쓸 줄 몰랐으나/남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현명해지는 법을 배웠다./너무 막막하다고, 그래서 포기해야겠다고 말하지 말라./나는 목에 칼을 쓰고도 탈출했고/뺨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살아나기도 했다./적(敵)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었다./나는 내게 거추장스러운 것은 깡그리 쓸어버렸다./나를 극복하는 그 순간 나는 칭기즈 칸이 되었다.’

그동안 그가 약탈자의 이미지로 전해졌던 이유는 그에게 정복당했던 주변 민족들의 역사가 그를 약탈자로 기술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 현대 문명연구가들은 칭기즈 칸의 승리를 개방적인 유목문화가 폐쇄적인 농경문화에 승리한 문명사적 사건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미국 ‘워싱턴 포스트’와 ‘타임’은 지난 1천 년 동안 세계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칭기즈 칸을 선정하기도 했다. 칭기즈 칸의 무덤을 찾을 수 없는 이유는 칭기즈 칸이 세운 몽골제국은 인류 역사상 있었던 단일 제국 중 가장 큰 나라로써 유럽과 아시아 대륙 동서쪽에 걸쳐 약 33,420,000㎢라는 어마어마한 영토를 가졌던 나라이다. 그러나 지금의 몽골은 중국과 러시아의 동화정책(同化政策)에 의해 국토와 민족은 분열되었고 러시아의 도움으로 외몽골만이 간신히 독립을 유지하고 있지만 국력은 미약하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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